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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기행] (46)이성부의 시집 '야간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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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기행] (46)이성부의 시집 '야간산행'

입력
2000.11.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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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이 보여주었네, 詩에 다가가는 길을열 살짜리 딸이 시인인 아빠에게 묻는다. “시 좀 가르쳐 줘, 시가 뭐야?” 아빠는 대답하지 못한다. `갈보가 돼버린 시, 아편쟁이가 된 언어, 저를 시궁창 쓰레기통 속에 처박아둔지 오래인 언어, 저를 몸째로 팔아버린 언어'(<시에 대하여> 에서)를 어떻게 가르쳐줄 수 있나.

아빠는 그것이 아름답고, 너를 꿈나라로 데려가고, 무엇보다 그것이 `평화'라는 것을 알릴 수가 없다. 시를 쓸 수 없었던 이성부(李盛夫)씨는 시를 버리고 산을 찾았다. 1981년이었다. 산은 그에게 신생을 주었다.

구기동 쪽으로 삼각산을 오르면서 이씨는 “서울은 좋은 도시”라고 말했다. “지하철 두어 구간 타고, 버스 몇 정거장만 지나면 이렇게 산을 오를 수 있으니 시민의 복”이라는 것이다. 단풍이 끝물인 삼각산은 서울 안에 있는 명산이다.

산자락의 주택가가 끝나는 곳에서 곧바로 등산로는 시작된다. 십여 분만 느린 걸음으로라도 오르다 보면 신라 진흥왕의 순수비가 정상에 세워져 있는 비봉(碑峰)의 모습이 시원하게 눈을 틔워준다. 연산군이 여인네들을 희롱했다는 탕춘대(蕩春臺)를 지나면 조금은 가파른 산길이 기다리고 있다. 평일에도 등산복 차림의 시민들이 곁을 스쳐간다.

`가까이에서 더 모르는 산/그래서 아내 같다/거기 언제나 그대로 있으므로/마음이 놓인다/서울 어느 거리에서도/바라보기만 하면 가슴이 뛰는 산/내 것이면서 내가 잘 모르는 산'이라고 이씨는 시집 `야간산행'(1996)에 실린

에서 이 산의 푸근함을 이야기했다. 그는 북한산 대신 삼각산이라는 원래 이름을 되찾아주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60년대까지만 해도 삼각산이라 불렀습니다. 구파발을 지나 통일로 쪽으로 가다 이 산을 보면 왜 우리 조상들이 삼각산이라는 훌륭한 이름을 붙였나 한 눈에 알 수 있습니다. 인수봉-백운대-만경대가 그대로 드러나지요.” 80년대 삼각산이 국립공원으로 지정되면서 도봉산까지 싸잡아 북한산이라는 모호한 이름이 붙여졌다는 것이다.

삼각산에서 비롯해, 한반도의 산들, 백두대간이 그에게 문득 다가온 것은 `80년 광주' 때문이었다. 그가 태어나서 자랐고 문학에의 열정을 키워주었던 고장이 짓밟히는 것을 보면서 그는 시를 버렸다.

“술만 퍼마셨다. 사람들도 멀리 했다. 나는 날마다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졌다. 모든 언어와 문자, 시도 거짓말 같아 남의 시를 읽을 수 없었다.

불신과 혐오만 내 안을 채웠다. 시를 생각하지도 쓰지도 않았다.” 70년대 초반 평론가 김현(작고)이 기획해서 낸 `오늘의 시인총서'로 나온 그의 두번째 시집 `우리들의 양식'은 문학청년들의 필독서였다. 어두운 시대에 남성적이고 건강한 민중적 서정의 시인이었던 그도 80년 광주 앞에서 시를 버렸다. 이후 6~7년간 그는 “살아 있다는 것만도 죄인”이라고 생각하며 현실에서 도피해 버린다.

산행의 시작은 그 자신의 표현대로라면 “현실 도피이자 자기 학대로서의 비겁함”이었다. 처음에는 직장 산악회의 맨 뒤에서 동료들의 발꿈치만 보며 삼삭산을 오르내렸다. 스스로 육체를 학대하는 행위의 대상 이외에 산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1년쯤 지나자 산이 그에게로 왔다. “광화문 네거리에서 바라보면 멀리 북쪽으로 이마를 쳐든 보현봉 봉우리가 나를 손짓하는 것만 같았지요.” 그는 전국의 산들을 찾기 시작했고 85년을 전후해서는 릿지(암벽)를 탔다. 암벽 등반은 그에게 `육체를 가진 언어'를 되찾아준다.

처음에는 공포와 모험심의 대상이던 바위에 올랐을 때 “바위와 내가 합체되면서 생명 있는 것과 없는 것이 함께 어우러지는, 합체(合體)를 느낀다”고 그는 말했다. `바위가 손짓하며 나를 부를 때/나는 이미 나를 주체할 수 없다/외로움 속에서/무서움 속에서/비로소 열리는 세계- 이 몸 떨리는 합일(合一)”(<바위타기-5> 에서). 다섯 시간이 걸려 처음으로 삼각산 정상 백운대를 오르고 합일을 느낀 그는 이후 남들의 “나이 오십이 다 돼 미친 짓”이라는 비아냥을 즐기며 바위를 탔다.

그러기를 3~4년, 시가 다시 그에게로 왔다. 80년대의 끝자락에야 8년만에 나온 그의 다섯번째 시집 `빈 산 뒤에 두고'(1989), 이어지는 `야간산행'에 실린 시들은 산행으로 그가 되찾은 언어였다. 시를 버리고 산에만 열중했던 그가 산으로 말미암아 다시 시를 되찾게 된 것이었다. `야간산행'은

라는 서시로 시작한다.

`이제 비로소 길이다/가로막는 벼랑과 비바람에서도/물러설 수 없었던 우리/가도 가도 끝없는 가시덤불 헤치며/찢겨지고 피흘렸던 우리/이리저리 헤매다가 떠돌다가/우리 힘으로 다시 찾은 우리/이제 비로소 길이다.'

이때부터 그의 시는 거의 전부가 산시, 바위시가 되었다. “사회적 삶이나 서민정서의 표현도 반드시 산이라는 매체를 통해 걸러진다. 산 자체를 주제로 삼는 경우에도, 자연현상으로서의 정서뿐만 아니라, 거기에 삶을 보태고 나의 고통을 얹혀주는 것으로 되었다”고 그는 시작의 변화를 이야기했다.

삼각산의 봉우리 이름인 `숨은 벽'을 제목으로 해서 씌어진 그의 연작 시 첫 편은 그 변화를 이렇게 아름답게 보여준다. `내 젊은 방황을 추스려 시를 만들던/때와는 달리/키를 낮추고 옷자락 숨겨/스스로 외로움을 만든다/내 그림자 도려내어 인수봉 기슭에 주고/내 발자국 소리는 따로 모아 먼데 바위 뿌리로 삼으려니.'

28년간 신문기자로 일했던 그는 2년 전 현직에서 물러나 이제는 온전히 산을 찾고 시를 쓰는 일로만 살아가고 있다. 그는 이제 삼각산이나 설악산의 험한 바위능선을 오르는 대신 우리 국토의 줄기인 백두대간을 걷는다.

그가 최근 80편까지 쓰고 있는 연작 시 `내가 걷는 백두대간'은 매 산행마다 하루 10시간 이상씩 걷는 강행 종주의 발자취다. 백두대간 종주는 곧 우리 땅의 등뼈를 밟는 산행이다. 백두산에서 뻗어내려 허항령, 두류산, 금강산, 설악산, 오대산, 태백산, 소백산, 속리산, 추풍령, 덕유산, 육십령으로 이어지다 지리산 천왕봉에서 끝맺는 한반도의 혈맥이다.

그는 지리산만 100여 차례 올랐고 4번을 종주했다. 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지만 산은 낮은 곳에서 위로 치닫는 것이 원칙, 지리산 등반은 그의 백두대간 종주의 시발이다. 그는 “우리 현대사만 보더라도 지리산 세석평전에서 수천, 수만이 목숨을 잃었다.

산에 얽힌 역사뿐만 아니라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살이를 온전히 시로 담아내는 일이 내 죽을 때까지의 작업이 될 것”이라며 남명 조식이 읊었다는 `만고의 천왕봉이여, 하늘은 울어도 산은 울지 않는다'는 시구를 들려주기도 했다. 지리산에서 출발해 단 한번도 물을 건너지 않고, 능선으로만 걸어 백두산에 닿는 것이 그가 소망하는 백두대간 시의 길이다.

글 하종오기자 joha@hk.co.kr

숨은 벽 1

내 젊은 방황들 추스려 시를 만들던

때와는 달리

키를 낮추고 옷자락 숨겨

스스로 외로움을 만든다

내 그림자 도려내어 인수봉 기슭에 주고

내 발자국 소리는 따로 모아 먼데 바위 뿌리로 심으려니

사람이 그리워지면

눈부신 슬픔 이마로 번뜩여서

그대 부르리라

오직 그대 한몸을 손짓하리라

기다리지 않아도 오고

기다림마저 잃었을 때에도 너는 온다.

어디 뻘밭 구석이거나

썩은 물 웅덩이 같은 데를 기웃거리다가

한눈 좀 팔고, 싸움도 한판 하고,

지쳐 나자빠져 있다가

다급한 사연 들고 달려간 바람이

흔들어 깨우면

눈부비며 너는 더디게 온다.

더디게 더디게 마침내 올 것이 온다.

너를 보면 눈부셔

일어나 맞이할 수가 없다.

입을 열어 외치지만 소리는 굳어

나는 아무것도 미리 알릴 수가 없다.

가까스로 두 팔을 벌려 껴안아 보는

너, 먼 데서 이기고 돌아온 사람아.

약력

▩ 1942년 광주 출생

▩ 경희대 국문과 졸업

▩ 1967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우리들의 양식'당선

▩ 1969~1997 한국일보사 기자, 1998~1999 뿌리깊은 나무 주간

▩ 현대문학상(1969) 한국문학작가상(1977) 수상

▩ 시집 `이성부 시선' `우리들의 양식' `백제행' `전야' `빈 산 뒤에 두고' `야간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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