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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세이-유라시아 천년 / (8)중세사회의 세계인식-유럽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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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세이-유라시아 천년 / (8)중세사회의 세계인식-유럽의 탄생

입력
2000.11.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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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를에 도착한 것은 8월2일. 프랑스 남부 프로방스의 이 도시는 알퐁스 도데의 소설로 너리 알려져있지만 이미 4세기초 로마황제 콘스탄티누스가 새로운 수도를 정할 때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과 더불어 후보지로 염두에 두었을만큼 일찌감치부터 고대문명이 정착한 곳이다.지금도 이곳에는 로마문명의 유적인 원형경기장과 반원형의 극장이 잘 남아있다. 유럽을 다녀보면 고대 로마의 문명이 지중해를 중심으로 유럽대륙의 남부에 깊게 뿌리내렸음을 볼 수 있다.

지중해에서 론가을 거슬러 50Km만 올라가면 닿는 아를도 지형특성상 로마문명권 안에서 일찍부터 발전했다.

서양의 중세는 '게르만족의 대이동'에서 시작한 것으로 꼽는다. 이들이 로마 기독교문명과 결합함으로써 유럽이 탄생한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3세기부터 '햇볕을 찾아서', 좀 더 정확히는 남쪽의 문명과 식량과 더 쾌적한 주거지를 찾아서 서서히 남진한 게르만족은 5세기쯤에는 대량이주함으로써 유럽을 흔들어놓는다(476년 서로마제국의 멸망).

그중 가장 두드러지는 세력이 프랑크족이었다. 이들이 두드러진다고 하는 것은 반달 동고트 서고트 부르곤드 롬바르드족들은 근거지를 완전히 버리고 멀리 이동한 반면 프랑크족은 근거지를 버리지 않고 근거지에서 영역을 확대시켜나갔기 때문이었다.

그 때문에 로마문명권에 살던 토착민들에게 흡수되지 않을 수 있었다. 이들이 중세 유럽문명의 주인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이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들이 다른 게르만족들과의 영역다툼에서 더 우위를 차지하려면 토착세력인 로마가톨릭과 손잡을 수밖에 없었다. 프랑크족의 왕, 클로비스는 507년에 정통 가톨릭으로 개종했으며 이어 800년에는 샤를마뉴가 로마 황제의 관을 받기까지 했다.

그렇더라도 이는 프랑스를 중심으로한 북서부 유럽이 로마로부터 멀리 떨어져있다는 낭패감을 돋보이게 할 뿐이다.

중세인들이 처음 '유럽인'이라는 자의식을 가진 것은 공통의 대립되는 세력이 나타났을 때였다. 8세기초 이베리아반도의 서고트족을 몰아낸 이슬람세력은 피레네산맥을 넘어 북진했다.

이스람에 맞서는 기독교인, 아랍인에 맞서는 '유럽인'이라는 각성은 이때야 비로소 첫 선을 보였으며 732년 이스람 세력을 물리친 샤를 마르텔은 결국 그가문에서 유럽 전체를 통치하는 샤랄마뉴대제를 탄생시킬 수 있게 된다.

샤를마뉴 대제의 통치와 더불어 확고히 뿌리내린 '유럽인'이라는 각성은 그러나 그의 죽음에 이은 세 아들의 갈등으로 가산제국가에 가까운 과거로 유럽을 돌아가게 만든다.

다시 '유럽인'이라는 인식이 보편화하는 것은 이스람문명을 공격하는 십자군전쟁기(11세기말~13세기)에서였다.

이때면 이미 유럽인은 나라와 지배군주는 달랐지만 동일한 이념(가톨리시즘)을 지닌 동질의 집단이 되어있었다. 기독교 유럽이 형성된 것이다.

각기 상이한 삶의 구조와 색조를 지녔던 지중해 유럽과 북부 유럽은 기독교를 매개로 하여 하나의 보편세계로 결합하였다. 기독교는 유럽에 공통의 규범적 틀을 제공하였고, 800년 이후 유럽의 무게중심은 지중해 지역에서 북서 지역으로 이동하였다. 또 한 교회의 역할에 힘입어 부족과 씨족의 유대관계가 약해지고 핵가족이 가정생활의 기본단위가 되면서 중세적 '개인주~p'가 나타났다.

기실 유럽인들은 중세 기시 내내 더 높은 문명권에 대한 열등감에 시달렸다. 당시 지식인들은 고대로의 복귀에 대한 향수를 떨쳐버릴 수 없었고 이슬람과 비잔틴으로부터 문헌과 지식을 끊임없이 받아들여야 했다.

'중세'라는 용어를 만들어낸 것은 15~16세기 르네상스기 인문주의자들이었다. 과거의 유럽을 부끄럽게 생각한 이들 인문주의자들은 15세기에 이르러서야 자신들의 시기가 고대에 버금가는 문화와 문명의 수준에 도달했다고 자부하고 두 개의 높은 봉우리 사이에 끼어있는 낮은 단계의 중간지대를 하나의 장기적인 시간단위로 설정하여 고대-중세-근대라는 시대구분법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동시에 이들은 중세를 '암흑시기'로 그려냄으로써 그 시기가 이룩한 새로움과 풍요로움을 간과하고 훼손한다. 또한 새로운 시기로의 이행을 단절로 보게 만들어 유럽의 형성이 얼마나 지루하고 지난한 과정이었는가 하는 점을 놓치게 한다.

이들로서는 게르만족의 대이동에서 비롯된 서로마제국의 멸망이나, 근대 유럽을 낳게한 중세 이행과정의 깊은 뜻을 이해할 수 없었고 당시엔 유럽이 지중해세계의 여러문명의 대해서 우월성을 입증할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근대의 '강한'유럽을 만들 것은 역설적이게도 중세 유럽의 이'열등감'과 상대적으로 낮은 생산성이 었다. 알다시피 유럽인의 주곡은 밀이다.

밀은 농업혁명 이전까지 한 알을 뿌리면 세 알을 수확할 수 있는 농업생산성이 가장 낮은 곡류중의 하나였다. 반명 중화문명권의 주곡인 쌀은 한 알을 뿌리면 200알의 수확을 얻었는데 남송(南宋)대에 이를러 이앙법이 개발됨녀서부터는 그 이상의 수확도 가능해졌다.

남아메리카의 마야.아즈테크 문명권의 주곡인 옥수수는 3,000배의 수확도 가능하다.주곡의 생산성이 높으면 좁은 면적에 더 많은 인구를 부양할 수 있고 이는 전제왕권이 성립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준다.

그러나 유럽은 밀의 낮은 생산성 때문에 단위면적당 부양할 수 있는 인구가 적었다. 오랜 기간 절대 왕권이 자리잡을 절대 인구가 부족했다. 더구나 밀농사는 지력을 고갈시켜 같은 땅에 매년 농사를 짓는 것도 불가능했다.

따라서 유럽에는 한 해는 농사를 쉬는 휴경지가 생겨났고 휴경지를 활요하는 목축이 농경과 동시에 발전하게 되었다. 중세 초만해도 노예와 자유민의 비율이 높던 농민 구성은 중세가 진전되면서 자유민은 예속민화하고 노예의 지위는 차츰 상승하면서 농노가 주력이 되었다. 이들은 50호에서 100호 단위의 마을을 형성하고 공동경작을 했다. 이 같은 촌락공동체는 잉여생산물을 놓고 지주들과 치열한 각축전을 벌일 수 있게 해주었다. 이에 힘입어 인구는 프랑스 지역에서 이미 1300년에 1900년의 수준에 도달하였다.

국가의 힘이 약해 토지경영 이외에 마땅한 잉여를 발견하기 어려웠던 지배층은 결국 농민들에게 경작권에 대한 자유를 더 주고 세금이나 지대를 더 걷는 것이 낫다는 '내포적 수취방식'을 추구하게 되었다. 12~13세기에 이미 노동효율을 올리는 방안을 고민한 유럽이기에 근대 시민사회에서 앞서 나갈 토대가 마련된 것이기도 하다.

요컨대 하나의 문명으로서 유럽은 중국이나 이슬람 또는 인도에 여러 가지 점에서 뒤졌지마 돌이켜 볼 때 이 상대적 후진성이 역동성의 발판이 되었다.

상대적으로 빈약한 생산력, 약한 국가와 정치적 부할구조, 이것이 무정부상태로 전락하는 것을 막았던 국가 안의 국가이자 국가 밖의 국가였던 보편교회, 공동체에 기반하면서도 종족의 굴레를 일찌감치 벗어 던졌던 핵가족구조, 바로 이것이 이후의 유럽에게 행운이 찾아 왔을때 그것을 기회로 만들어주었던 요인들이다.

최갑수 서울대 서양학과 교수

협찬:삼성전자. 아시아나 항공

■로마에 우뚝선 '韓人신학원'

유럽 기독교 문명의 중심지는 지금도 교황청이 있는 이탈리아의 로마다. 이 로마에 한국 가톨릭의 신학교가 새워졌다.

10월1일 개원한 로마한인신학원.유럽과 북남미의 40여 나라에서 로마에 신학원을 설치했지만 아시아.아프리카권 국가 중에서는 우리가 처음이다.

신학원은 대지 5,000여평에 연건평 1,162평으로 기숙사와 주교회의 연락사무소 건물로 구성돼있다. 기숙사는 로마로 유학 온 한국 사제들이 묵는 곳. 연락사무소는 한국주교회의 직속 사무소로 교황청을 비롯한 타국 교회와의 유대강화와 정보 교환,상화협력 등을 맡게 된다.

8일에는 신학원 부설 로마한국순교성인성당 봉헌미사가 열렸다. 성당은 로마에 사는 한인 신자와 로마를 찾는 한국 신자들의 사목센터 역할을 하는데 주일과 대축일에는 오전 10시 한국어 미사를 봉헌한다. 성당 앞에는 김대건신부 동상과 한국순교성인기념탑이 세월질 예정이다.

신학원에는 로마 교황청도 각별한 관심을 보였다. 대개 로마의 신학원들은 개원 후 수년간 시험단계를 거쳐 교황청립신학원으로 승격되는데, 로마한인산학원은 개원도 하기전인 2월11일 이미 교황청립신학원으로 승격됐다.

교계 안팎에서는 이에 대한 아시아 복음회에 대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높은 관심을 반영하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로마한인신학원 초대원장인 정은규 신부는 "우리 가톨릭이 그만큼 신장했기 때문"이라며 "신학원의 모범이 되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박광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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