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의 경제위기가 과연 올 것인가 많은 사람들이 묻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필자의 대답은 한결같이 조건부였다. 부실기업의 퇴출을 비롯한 기업구조조정을 제대로 하면 경제위기는 오지 않을 것이지만 그것이 제대로 안되면 경제위기는 다시 올 것이다라고.그러나 이제 지난 3일 금융권이 발표한 29개의 청산 및 법정관리기업의 명단을 보고 더 이상 조건을 달 필요가 없어졌다. 이제 나는 확신을 가지고 `경제위기는 반드시 온다'라고 말할 수 있다.
정치 및 경제문제에 관한 주요 이슈 중에서 제2의 경제위기를 피하기 위해서는 `부실기업을 과감히 퇴출시켜야 한다'는 말처럼 관계, 경제계, 학계 등으로부터 광범위한 여론의 지지를 받은 주장도 근자에 없을 것이다. 처음에는 정부도 전적으로 이 주장에 동조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발표된 부실기업 판정결과를 보면 지난 98년의 부실기업 퇴출조치와 전혀 다를 바 없이 숫자 맞추기 등 형식적인 모양내기에 불과한 인상이 짙다.
경제위기를 피하기 위해서 부실기업의 과감한 퇴출은 왜 필수적인가. 부실기업들이 시장의 불확실성을 증폭시켜 금융시장의 원활한 기능을 방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은행을 비롯한 금융기관들은 옥석을 가릴 수 없는 불확실성에 직면하여 기업에 대한 대출을 줄일 수밖에 없고, 투자자들은 기업이 발행하는 채권이나 주식을 외면할 수밖에 없다.
뿐만 아니라 퇴출되지 않고 화의나 워크아웃, 법정관리 등을 받고 있는 부실 기업들은 제품시장에서의 공정한 경쟁을 크게 저해한다. 금융기관의 각종 지원을 등에 업은 이들 부실기업들은 어떻게든 목숨을 유지하기 위해 덤핑공세 등 시장질서를 크게 교란시키고 있다.
요컨대 부실기업이 적시에 시장에서 퇴출되지 않음으로써 우리 경제 전반에 걸쳐 자금줄이 막히고 건실한 기업들조차도 시장에서의 불공정한 경쟁에 직면하여 서서히 동반부실화하고 있는 것이다.
이번에 발표된 소위 29개 퇴출기업의 명단을 보고 실망하는 까닭은 그것이 과감하지 못하고 시늉에만 그치고 있기 때문이다. 29개 기업 중에서 이미 법정관리를 받고 있던 기업이 13개에 이르고 화의나 워크아웃을 하고 있던 기업도 7개에 달한다.
즉 20개 기업의 경우에는 시장의 불확실성이 개재될 여지가 없이 이미 부실기업임이 판정된 사안이었다. 나머지 9개 기업 중에서도 한라자원과 기아인터트레이드는 이미 청산절차가 진행 중이었고 대한통운도 이미 법정관리가 확정된 기업이다.
29개 기업 중에 법정관리에 넣기로 한 11개 기업의 경우에도 그것이 과연 퇴출을 의미하는지 의문이다. 실제로 지난 98년 1차 부실기업판정에서 법정관리에 포함된 7개 기업이 지금도 명맥을 잇고 있다.
무엇보다도 초미의 관심거리였던 부실 빅3인 현대건설과 쌍용양회를 향후 금융기관의 신규지원 없이 기존여신의 만기만을 연장해 주되 부도가 나면 즉시 법정관리를 신청하겠다고 하는 것은 시장의 불확실성을 제거하여 경제의 흐름을 회복하겠다는 부실기업 퇴출의 본래 목적을 훼손시키기에 충분하다.
불확실성이 제거되지 않은 시장에서 향후 이 거대 부실기업을 비롯한 수많은 여타 부실기업들이 어떠한 모럴해저드를 보일지 짐작하기에 어렵지 않은데 이러한 모든 정황에 비추어 필자의 견해는 아주 분명하다. 경제위기는 반드시 온다. 그러니 독자 여러분은 미리미리 대비해야 할 것이다.
박상수 교수
경희대 경영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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