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정권에서도 재벌개혁은 틀린 것 같다. 최근 정부가 발표한 제2차 기업지배구조개선안을 보면 정부가 그동안 줄기차게 부르짖어온 재벌개혁은 구두선으로 끝났음을 확신하게 된다. 정부는 기업지배구조개선안의 양대 핵심사항 중 집중투표제는 아예 의무화하지 않고 증권관련 집단소송제는 유예기간을 둔 뒤 단계적으로 실시하겠다고 밝혔다.유예기간이 2~3년은 될 것이라는데 그 기간이면 이 정권의 임기가 끝난다는 점을 감안할 때 정부는 개혁의지를 아예 거두어들인 것이라 할 수 있다.
집중투표제와 집단소송제는 우리기업 지배구조개선의 핵심 과제라 할 수 있는 투명경영과 책임경영을 확보하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이다.
집중투표제는 그동안 철저하게 소외당해온 소액주주들이 기업의 의사결정과정에 참여하는 사전감시장치이며, 집단소송제는 대주주의 위법행위로부터 입은 손해를 보상받을 수 있는 사후적 제재수단이다. 정부가 용역을 발주한 외부기관도 기업지배구조개선을 위해 양대제도의 도입을 권고하고 있는 것을 보면 제도의 필요성은 객관적으로 인정되고 있는 셈이다.
이렇듯 필요한 제도의 실시를 시늉만 내고 있는 정부안에 대해서조차 재벌들은 격렬하게 반발하고 있다. 어차피 재벌들의 의도대로 돌아가는 판국이지만 그 논리만이라도 반박해주고싶다. 재벌들은 양 제도의 도입을 시기상조라는 이유와 부작용이 많다는 점을 들어 반대하고 있다.
시기상조라 함은 제도도입의 당위성은 인정하나 시기가 적절하지 않다는 주장인데 그렇다면 언제가 적기란 말인가? 환란으로 국가경제를 절체절명의 위기로 몰고간 주범이 황제경영이고 그 폐해로 인한 제2, 제3의 위기를 막기위해 온 국민이 재벌개혁을 염원하는 이 시점이 적기가 아니라면 재벌개혁은 언제나 가능한가.
경제가 안 좋아서 시기가 아니라고 한다는데 경제가 안 좋아진 이유가 황제경영때문이라는 걸 잊었단 말인가.
부작용이 많을 것이라는 지적도 그렇다. 재계는 집중투표제를 하게되면 소액주주에 의해 선출된 사외이사는 자신을 뽑아준 측의 이익만 대변하여 대주주측과 반목하고 대결을 조장할 것이라고 주장하는 데 이는 소액주주에 대한 참으로 잘못된 시각이며 사외이사제도에 대한 왜곡이다. 잘못이 없는 경영자를 누가 시비할 것인가.
소액주주의 목표는 경영을 훼방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기업가치를 높여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데 있다. 그 목적달성을 위해 대주주의 독단을 감시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동안 형해화(形骸化)한 이사회에서 전횡을 일삼아온 황제경영의 결과가 오늘날과 같다면 어느 정도의 갈등은 오히려 필요한 게 아닐까.
재계는 또 집단소송제에 대해서 소송의 남발과 악의적 소송, 소액주주의 도덕적 해이 등을 이유로 반대하고 있다. 집단소송제는 기업의 허위공시, 분식회계, 주가조작 등으로 입은 손해를 배상받기 위한 사법적 구제절차이다. 기업에 잘못이 없다면 소송이 있을 수 없다.
명백한 위법사실로 입은 피해를 보상받기 위해 모든 피해자가 각기 소송을 제기해야 한다면 그런 법체계와 소송제도는 누굴 위해 존재하는 건지 묻고 싶다. 악의적 소송은 제도적 장치로 얼마든지 막을 수 있다. 정작 중요한 것은 그러한 부작용을 염려하여 제도를 도입하지 않을 때 생기는 부작용이다.
법을 위반한 자가 법의 제재를 받지 않는다면 사회정의는 쓰레기통에 처박아 버려야 할 것이다. 소액주주의 도덕적 해이를 재벌이 우려하는 것은 지나가던 소도 웃을 일이다. 재벌들의 도덕적 해이로 인해 제기된 문제를 해결하자는데 아직 발생하지도 않은 상대방의 도덕문제를 거론하는 것은 후안무치한 일이 아닌가.
고질병을 일거에 치유하는 데 부작용은 따르게 마련이다. 약간의 부작용을 비용으로 재벌을 개혁하여 경제를 살릴 수 있다면 우리는 서슴지 말고 그 대안을 택해야 한다.
예종석ㆍ한양대 경영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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