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르트르는 지식인을 "자신의 지적 영역에서 쌓은 명성을 '남용'하여 기성 체제를 비판하는 사람"이라고 정의했다. 이 정의에서 '남용'이라는 말은 긍정적 뜻빛깔을 지닌다.사르트르에 따르면 바로 이 '남용'이야말로 지식인의 본질적 부분이고, 어떤 체제, 어떤 시대에도 지식인이 처할 수밖에 없는 불편함을 설명해주는 개념이다.
한 저명한 원자물리학자가 있다. 그가 자신의 연구실 안에 갇혀 복잡한 방정식을 풀고 있는 한, 그는 과학자일뿐 지식인은 아니다.
그러나 이 물리학자가 자신의 방정식이나 실험 결과가 사용되는 방식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할 때, 예컨대 그가 핵무기의 개발이나 사용을 비판할 때, 그는 한 사람의 지식인이 된다.
그는 어떤 정치적 판단을 천명하기 위해서 자신의 명성을 '남용'했기 때문이다. 미국의 언어학자 노엄 촘스키가 현대의 대표적 지식인으로 꼽히는 것도, 그가 언어학 영역에서 쌓은 명성을 '남용'해 끊임없이 기성 체제를 비판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시인이나 작가가 지식인 사회의 중심에 있던 시절이 있었다. 소설가 에밀 졸라는 자신의 문학적 명성을 '남용'해 프랑스군 장교 드레퓌스 대위에게 씌워진 '독일군의 간첩'이라는 누명을 벗겨냈고, 파블로 네루다도 시인으로서의 명성을 '남용'해 자신의 반파시즘 입장을 조국 칠레와 세계에 천명했다.
한국에도 작가가 으레 지식인이던 시절이 있었다. 70년대의 자유실천 문인협의회(자실)와 80년대 이후의 민족문학 작가회의(작가회의)는 그 시대의 가장 뛰어난 문학적 재능들을 아우르면서 민주화 운동의 전위에 있었다.
'오적'의 김지하나 '농무'의 신경림에서 '지울 수 없는 노래'의 김정환이나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의 황지우에 이르기까지 자실이나 작가회의와 얽힌 이름들은 그 시대의 가장 뛰어난 문학만이 아니라 그 시대의 가장 헌걸찬 지식인상(像)을 대표했다.
정치가 독점했던 사회 권력이 87년 6월 항쟁 이후 거대 자본이나 언론에 분배되는 것에 맞추어 그런 지식인-작가는 점차 사라져가고 있는 것 같다.
그것은 강준만씨가 '부드러운 파시즘'이라고 부르는 새 얼굴의 기성 체제에 작가들이 더 쉽게, 더 깊이 포섭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지역 문제나 수구 언론 문제 같은, 우리 사회의 핵심적 의제들에 대해 작가들이 드러내는 무관심은 놀라울 정도다.
적어도 언론 문제는 우리 사회에서 문학적 담론으로서는 금기의 영역에 있다. 작가회의도 예외는 아니니, 수구언론에 대한 이 '진보적' 문인단체의 너그러움은 "존재하는 것이 가장 아름답다"는 보수주의의 표상이라고 할 만하다.
사회의 변화에 따라 작가의 존재 방식이 달라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금기의 벽 안에 갇힌 문학이란 얼마나 왜소한 것일까?
편집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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