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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이야기 / 구두로 이룬 작은 통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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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이야기 / 구두로 이룬 작은 통일

입력
2000.10.3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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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쪽에서 생산된 구두나 북쪽에서 만든 것이나 똑같네요!”엘칸토 매장에서 구두를 고른 한 신사는 “북한 공장에서 생산한 것”이라는 설명에 고개를 끄덕인다. 그도 그럴 것이 깔끔한 손질하며 세련된 스타일이 흠 잡을 데가 없다.

많은 기업들이 이제 막 북한에 가고 북한 상품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지만 이미 3년 전인 1997년부터 우리 기술지도로 북한 공장에서 한 달에 1만 켤레씩 만들어내는 엘칸토 구두는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일품으로 대접 받는다.

평양시 청춘거리에 자리잡은 공장에서 400여명의 북한 식구들이 한 가족처럼 일하고, 구두 만드는 일이 완전히 손에 익어 제품 다루는 솜씨가 남쪽 공장 기술자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

하지만 이렇게 가까워지고 숙련되기까지는 서먹서먹하고 어색한 일들이 많았다. 94년부터 시작된 경협논의 첫 결실로 97년 9월 엘칸토 중국공장으로 북한 기술자와 근로자들을 초청해 기술지도를 할 때는 상당히 힘들었다.

난생 처음 보는 ‘반짝 구두’를 신은 남측 기술자들로부터 중국 땅에서 기술지도를 받자니 그들로서는 자존심이 상당히 상했을 터였다. 대뜸 북한 기술자로부터 “우리는 식사를 별도로 하게 해 주시라요”라는 말이 나왔다. 이름을 물어보면 “왜 묻습네까?”라며 퉁명스런 반문이 돌아왔다.

가슴이 답답했다. 어쩌다가 같은 민족이 밥도 함께 먹을 수 없고 이름도 물을 수 없단 말인가? “손님이 왔으면 같이 식사를 하면서 환대하는게 우리의 예의고 풍습인데 한끼만이라도 같이먹자”고 부탁해 공장 식당에서 간신히 첫 만찬을 했었다.

그들이 가지고 온 북한 술을 꺼내놓고 잔이 돌고, 웃고 얘기하고 자연스레 경계심이 풀리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다음날부터 서로 불편 없이 밥도 퍼주고 국도 날라주고 하면서 가족 같은 분위기가 됐고 기술지도 효율도 그만큼 올라갔다.

엘칸토 북한 공장 근로자들의 80% 를 차지하는 여성들은 북한의 경공업대 구두학과 출신들이 상당수다. 학교를 갓 졸업한 20~22살 나이지만 남측 시방서와 생산설비, 원자재를 그대로 공급받고 우리 제조 기술을 손에 익혀 꼼꼼하고 재빠른 솜씨가 여간하지 않다.

북한내 최고위층 인사가 공장을 방문해서는 “이런 고급 구두가 다 북조선에서 나옵네까…”라며 직접 신어보고 감탄했을 정도다. 조만간 지갑과 벨트도 북에서 생산한다.

그동안 여러 차례 방문해 기술지도를 하다보니 이제는 현장에서 같이 어깨춤을 추고 농담도 주고받고, 가족관계도 서로 애기하며 떠날 때는 “다시 만나요” 노래도 부른다. 4년 가까이 함께 일하다보니 어느 틈엔가 엘칸토 구두를 중매삼아 우리들 만의 ‘작은 통일’을 이룬 느낌이다.

정주권 엘칸토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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