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혹 '대쪽' 소리를 들으며 정의감 하나로 지내온 검사직이지만, 검사직이 과연 나의 적성에 맞는 직업일까, 꼭 검사의 길로 들어서야 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는 때가 많다.워낙 얼렁뚱땅 검사가 되기는 했지만 적성에 따른 선택을 강조하는 아동청소년 전문가의 입장에 있다보니 더욱 그러하다.1972년 봄 무렵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장기집권을 위한 3선개헌의 음모를 서서히 드러내기 시작한 때였다.
화창한 봄날 서울대 문리대생들은 교정의 4ㆍ19탑 앞에서 최초의 삼선개헌 반대집회를 열었다. 그 자리에서 사회를 보던 동기가 갑자기 나를 첫번째 연설자로 지명했다. 즉흥 연설이었지만 3선개헌의 숨겨진 야욕을 낱낱이 질타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런데 그 장면이 현장에 쫙 깔렸던 정보요원들에 의해 사진이 찍혔다. 그리고 며칠밤 동숭동 부근 여관 방을 돌며 격문 등을 썼던 죄목까지 보태져 일약 주동자로 지목됐다. 처음엔 퇴학이라 하더니 나중엔 무기정학으로 감형됐다. 신문에도 대문짝만하게 실렸다.
얼마 후 학장이시던 고 민병태 정치학과 교수께서 부모님과 함께 오라는 전갈을 주셨다. 면담자리에서 민 교수는 "자네는 아무리 보아도 데모해서 출세할 사람이 못되는 것같네. 유학할 준비를 하는 게 어떻겠나"라고 충고했다.
그러던 어느날 갑자기 나를 붙잡으라는 검거령이 떨어졌다는 소식이 날아들었다. 파출소 뒷집에 살던 나는 전화를 끊자마자 곧바로 뛰쳐나갔다.
무턱대고 택시를 집어타고 남산으로 가자고 했다. 그곳에서 시가지를 한번 바라본 뒤 서울역으로 내려가 기차에 몸을 실었다. 막상 서울을 탈출했으나 갈 곳이 없었다. 문득 백양사 생각이 나 전남 장성에서 내렸다.
무엇하고 지내나 생각하며 서점에 들렀다가 헌법책과 민법총칙을 집어 들었다. 나의 고시공부는 이렇게 우연치않게 시작됐다.
행정고시에 붙어 사무관 노릇을 했다. 그러나 당시의 부패가 꼴보기 싫어 또 다시 사법시험에 매달렸다. 그것도 덜컥 붙어버렸다. 게다가 1등으로.
학창시절엔 문필가나 언론인이 되고 싶었다. 특히 신랄한 신문사 논설위원은 굉장히 멋있어 보였다. 그래서 백일장에 장원도 해보고 방송반장도 해보았다.
그런데 엉뚱한 검사의 길로 나갔다. 과연 잘한 일일까. 처음부터 아동, 청소년사업을 했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일을 많이 할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강지원 ㆍ서울고검 검사ㆍ전 청소년보호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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