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일지 새 장편소설 '진술'펴내작가 하일지(45ㆍ동덕여대 교수)씨가 새 장편소설 '진술'(문학과지성사 발행)을 발표했다. 그는 1990년 '경마장 가는 길'부터 시작, 8편의 작품을 통해 과감한 소설형식실험을 해오고 있다.
실재와 환상이라는 심리적, 철학적 주제를 다뤄온 그의 작품세계가 이번 소설에서는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원고지 700장 가량의 그리 길지 않은 장편 '진술'은 처음부터 끝까지 '나'가 수사관 앞에서 진술하는 모놀로그(독백)로 되어 있다. 수사관의 질문은 없고 나의 대답만 있다.
연극으로 치면 모노드라마이다. 우리 소설에서 단편은 몰라도 장편이 순전히 일인칭의 진술로 이루어진 경우는 처음일 것이다.
대학 철학교수인 나는 처남을 살해한 혐의로 경찰에 체포됐다. 나는 마흔네 살이고 스물여덟 살 먹은 아름다운 아내가 있다.
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혐의를 부인한다. 내가 죽인 것은 고교 선배이기도 한 손위 처남의 허상일 뿐이라고. 그러나 소설의 결말에 이르면 나의 아내는 8년 전에 이미 죽었고, 나는 그 아내를 못잊어서 지금도 아내의 허상과 살고 있으며, 사실은 허상이 아닌 실재의 처남을 죽인 것이 드러난다.
줄거리에서 드러나듯이 작가는 이번 소설에서도 '우리가 실체라고 믿는 것, 또는 그것이 허상이라고 판단하는 우리의 이성(理性) 자체를 신뢰할 수 있는가' 하는 어려운 문제를 제기한 셈이다.
하룻밤 사이의 진술을 통해, 자신의 생을 송두리째 걸고 허상인 아내와 살아가는 사내의 삶을 풀어놓는 형식은 이러한 문제를 담기 위한 그럴듯한 그릇이다.
낯선 주제와 형식에도 불구하고 '진술'은 추리소설적 기법, 치밀한 심리 묘사, 열여섯 살 연하 제자와 교수의 사랑 이야기 등의 얼개로 재미있고도 빠르게 읽힌다. 극적인 진술이야말로 타자의 귀를 솔깃하게 하는 진짜 이야깃거리인 모양이다.
하씨는 "이 작품의 혼란스런 모놀로그는 곧 내 내면의 언어들"이라며 "완성하는데 2년이나 걸린 이 소설을 쓰며 가장 고통스러웠던 것은 고뇌에 찬 인간의 독백을 한 줄 한 줄 떠올려 옮기는 일이었다"고 말했다.
이번 소설 속에도 현실에는 없는 '경마장' 이야기가 나온다. 독특하고도 난해한 스타일로 그간 발표작마다 논쟁을 촉발하기도 했던 그는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것도 이제는 신물이 났다. 소수의 애독자들만이라도 책을 읽고 실망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라고 덧붙였다.
하종오기자 joha@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