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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숭호가 만난 사람] 정옥자 규장각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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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숭호가 만난 사람] 정옥자 규장각 관장

입력
2000.10.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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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모도원(日暮途遠)이다. 일모도원‥.”정옥자(鄭玉子?58) 규장각 관장은 기자가 “정조대왕이 남긴 말 중 가장 새겨들을 것이 뭐냐고 묻자 곰곰이 생각하다 독백하듯 이렇게 말했다. 그러더니 한 번 숨을 모아 쉬곤 “정말 해는 저물고 갈 길은 먼데‥, 말년에 혼자서 이 말을 되뇌어야 했던 대왕의 고뇌를 이해해야 한다“고 나지막이 말했다.

정 관장은 정조대왕을 짝사랑하는 사람이다. 그는 “왕에게 그런 무엄한 말을 해서는 안 된다“고 했지만 그를 아는 사람들은 오래 전부터 그를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대왕과 대왕의 시대를 학문적 관심의 대상으로 정하고 오랫동안 천착해온 그를 이렇게 부르는 것은 무례가 아니라 경의일 것이라고 기자는 믿는다.

대왕이 즉위 첫해인 1766년 설립한 규장각 200여년 역사상 최초의 여성 관장인 그는 10월17일부터 11월4일까지 규장각에서 `정조, 그 시대와 문화'라는 이름의 행사를 열고 있다. 대왕 서거 200주년인 올해가 가기 전 그가 대왕에게 바치는 최고이자 마지막 흠모가 담긴 행사다. 기자도 올해가 가기 전 그의 도움으로 대왕에 대한 글을 써보고 싶었다. 이 글을 그를 통한 대왕과의 인터뷰라고 하고 싶은 것이다.

_정조는 어떤 왕이었나. 어떤 지도자였나.( 이 질문은 그가 왜 정조에게 깊이 빠지게 됐나라는 것과 같은 것이다.)

“대왕은 교화(敎化)를 통해 설득하고, 스스로 모범이 되어 백성의 자율성을 신장시켜주었던 지도자였다. 교화란 솔선수범으로 백성을 저절로 물들게 하는 것이다. `교화'를 권위적이고 구시대적인 개념이라고 비판도 하지만 절대 그게 아니다.

사회지도층의 모범과 수신이 필요한 요즘에는 더욱 교화를 통한 지도가 필요하다. 대왕은 또 억울하고 차별 받는 계층을 거두었으며 기운 옷을 찾아 입던 근검한 사람이었다. 언행일치가 완벽했던 지도자였다.“

_정조가 그런 왕이 될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인가.

“대왕은 군주였지만 그 전에 탁월한 학자였다. 역대 왕 중 문집(홍재전서弘齋全書)를 남긴 분은 대왕이 유일하다. 이 문집에 담긴 대왕의 지적수준은 당대 어느 학자도 뛰어넘을 수 없는 탁월한 것이었다.

대왕은 왕조시대 지도자에게 필요했던 `문(文)사(史)철(哲)'을 누구보다 깊이 이해하고 이행했던 사람이다. 이렇듯 깊은 공부를 통해 쌓은 인문적 소양과 학문적 능력이 그를 철인군주(哲人君主)로 만들었을 것이다.“

그는 대왕이 19살 때 아버지 사도세자의 죽음을 겪으면서 공부에 빠져들게 되었다고 설명했다. 일찍부터 인생의 어두운 면을 보게 되자 학문으로 현실의 고난을 뚫으려 했다는 것이다.

또 대왕이 즉위하기 전까지 암살위협을 받은 것도 학문에 침잠케 한 이유라는 말도 해주었다. 암살을 피하기 위해 새벽녘 닭이 울 때까지 잠을 자지 못했던 대왕으로서는 깊은 공부가 도피처였을 수도 있었다는 말이다.

_세종대왕을 우리는 성군이라고 배웠다. 세종과 정조의 차이는 무엇인가. 두 분을 비교할 수 있나.

“물론 세종대왕도 역사에서 찾기 드문 성군이지만 두 분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세종은 태종이 닦아놓은 안정된 반석 위에서 통치를 시작했지만 정조는 왕위계승조차 확실치 않은데다 시대적으로는 명나라의 쇠망과 청의 발흥, 성리학의 쇠퇴와 실학의 대두라는 격변기에 개혁을 추진해야 했던 군주였다.

사회, 경제적으로도 농업국가에서 상업과 공업의 중요성이 인식되기 시작했던 때이어서 전통을 유지하면서 변화를 수용시켜야 했던 어려웠던 때의 지도자였다. 그런 환경 속에서 개인적으로든 국가지도자로든 뛰어난 성취를 쌓기란 힘든 일이다. 세종대왕보다 더 높은 점수를 받아야 한다고 본다.“

_개혁이란 말이 나와서 물어보는 건데 대왕은 개혁을 추진하면서 여러 당파를 고루 기용하려고 노력했다. 그의 노력에서 오늘날 우리 사회의 지역 갈등이나 계층 갈등을 치유하는데 어떤 교훈을 얻어야 하나.

“영조 때 본격화한 탕평책은 대왕의 시대에 이르러 부작용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영조대왕의 탕평책은 말 그대로 `안배'의 정책이었다. 사색당파의 인물을 고루 기용한다는 영조의 탕평책은 `능력과 학식을 키우지 않아도 한 자리가 돌아온다'는 생각을 퍼지게 했고 이로 인해 선비들의 사기가 무너지게 됐다.

공부하지 않는 선비가 등용됨에 따라 진정한 선비들의 사기가 흐트러진 것이다. 정조는 즉위 후 기존의 탕평책에 이런 문제가 있음을 파악하고 능력이 없으면 등용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하는 `원리 탕평책'으로 전환시켰다. 정조의 이런 인사정책은 배워야 할 것이다.“

_결국 관장님의 대왕에 대한 모는 뛰어난 지도자를 그리워하는 것이라고 보이는데 왕조시대의 제왕이 오늘날 민주주의시대의 지도자가 될 수 있을까. 세습군주와 선출된 지도자 사이에는 차이가 있지 않을까.

“지도자가 된 후를 말하는 것이다. 왕이건 대통령이건 국민의 평안과 국가의 안위를 걱정해야 하는 것은 마찬가지다. 대왕은 왕위를 물려받아 군주가 되었지만 백성과 나라를 위해 몸을 던졌던 분이다. 대왕이 오늘날의 지도자라 하더라도 인간에 대한 연민과 사랑으로 가득 했던 그의 품성과 능력으로 미루어 훌륭히 나라를 이끌었을 것이라고 믿는다.“

그는 신하들보다 깊은 학문으로 그들을 이끌되 인간적 풍모로 그들 스스로 자신을 추종케 한 대왕의 통치기술에서 `권위를 유지하되 조직을 유연하게 이끌어야 한다'는 현대적 개념의 리더쉽과 조직관리론을 찾아낼 수 있다고 말했다.

그의 말을 한마디 더 빌리면 “대왕은 유머감각도 뛰어나 궁정을 엄숙하고 질서정연하지만 화기가 넘치는 곳으로 이끌었다.“(기자는 지면사정으로 대왕의 유머감각을 일단이라도 전하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밝히지 않을 수 없다.)

_대왕이 더 오래 살았더라면 조선사의 흐름이 달라졌을 것인가. 대왕의 서거 후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등 그가 개혁 주체세력으로 키우고 활용했던 인물들이 숙청당함으로 개혁의 맥이 끊어졌다는 말도 있다. 대왕 역시 개혁반대세력에 의해 독살됐다는 말도 있고.

“역사에는 추측이 있을 수 없다. 그런 질문을 많이 받았지만‥. 다만 대왕 말년에 수원에 새 거처를 마련하려 했던 점 등으로 봐 왕위에서 물러나 상왕(上王)으로써 역할을 하려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대왕이 독살됐다는 말은 나는 받아들이지 않는다.

목욕을 자주 하지 못해 피부병(부스럼)으로 돌아가셨을 거라는 게 나의 생각이다. 젊을 때 새벽까지 공부하면서 옷을 벗지않고 잠자리에 들었던 버릇 때문에 목욕을 자주 못 했을 것으로 본다.

인터뷰가 거의 끝나면서 기자는 몇 가지 객적은 질문을 던져보았다. “남자로써 정조는 매력이 있는 사람이었나“, “TV사극이 대유행인데 정조대왕과 같은 훌륭한 인물에 대한 사극이 왜 안 만들어지는 가“라는 두 가지 였다.

앞의 질문에 대한 그의 답은 “왕에게 그런 무엄한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대왕의 교양과 학문적 수준에는 매력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자기절제도 뛰어난 분이고“라고 말했다.

대왕에 대한 사극이 안 만들어지고 있는데 대한 그의 생각은 “태평성대는 드라마의 소재가 될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세종대왕에 대한 드라마도 없지 않나. 우리 국민 정서상 정치적 갈등구조가 없는 시대는 연속극은 재미가 없을 것이다.

왕위를 둘러싼 갈등이 심했던 태종이나 세조 때를 소재로 한 연속극이 인기가 있는 것은 현재의 정치판이 그 시대의 정치판과 흡사하기 때문이다.“그는 ”대왕과 당시 학자들 사이에 있었던 지적 갈등, 학문적 다툼은 잘 구성하면 훌륭한 드라마가 되겠지만 그런 것을 제대로 파악해 전달할 만한 극작가는 없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마지막 질문은 대왕의 어록 중 새겨들어야 할 것이 있다면 뭐냐는 것이었으며 이에 대한 대답이 `일모도원'이었다.

_일모도원은 대왕이 처음 한 말이 아니다. 대왕의 독창적 생각이 담긴 말을 듣Gm 싶다.

“그래도 그 말밖에 생각이 나지 않는다. 대왕은 말년에 `해야 할 일은 많고 시간은 없는데 앞으로 나가지 못함이 너무 안타깝다'고 말했다. 지금 우리나라가 그런 처지 아닌가. 내 자신도 그렇고. 대왕과 같은 지도자가 정말 그립다.”

전업주부로서 뒤늦게 교수로

"규장각도서 佛교환 안돼"

서울대학교에서 오랫동안 국사 교수로 있던 정 관장은 지난 해 5월1일부터 규장곽 관장을 맡고 있다.

동덕여고를 거쳐 서울대 사학과에 입학한 그는 졸업 후 곧 바로 결혼, 학문과는 멀어졌다. 사학자로써 장래가 기대된다는 말을 듣기는 했으나 자료검토만 해야 했던 대학시절에 염증이 있었던 데다 식민사관이 주류였던 당시 학풍도 마음에 들지 않아 교수들의 기대를 저버린 것이다.

그러나 그는 “전업주부 생활이 6년째로 접어들자 이렇게 사는 게 아니다'는 생각이 들어 동양고전을 가르쳤던 사설연구기관 `태동고전연구소'에 다니면서 3년간 동양고전공부를 했다.

그는 “중학교(춘천사범병설중학교)와 고등학교 때도 한문공부를 많이 해서 한문에 대한 이해는 있었지만 이곳에서 본격적으로 한문을 배우면서 동양고전에 대한 이해가 깊어졌고 그것이 대학으로 다시 돌아오게 된 계기가 되었다.” 대학교 때는 개화기의 역사에 관심을 기울였지만 다시 학교로 돌아와서는 개화기의 배경이 됐던 18세기 영.정조 시대로 관심을 돌렸고 다시 정조시대에 천착, 이 시대에 관한 한 일가를 이루게 됐다.

그는 문학에도 관심을 갖고 있다. “고등학교 때 국문과를 갈 생각도 있었지만 역사를 충실히 공부한 후 문학을 하는 것이 옳다고 은사들이 만류, 사학을 하게 됴? 지만 꼭 한 번은 소설을 쓰고 싶다.” 사실 이따금 신문에 등장하는 그의 칼럼은 향기가 짙고 예화가 풍부해 설득력이 높다는 평을 듣는다. 자신의 표현대로 `문(文)사(史)철(哲)이 있는 글을 쓰기 때문일 것이다.

규장각 관장으로써 그의 요즘 최대 과제는 외규장각 도서 반환문제다. 그의 입장이 워낙 단호해 문제라고 할 것도 없을 것 같다. “이렇게까지 표현하는 내 자신이 우습기도 하지만 프랑스에서는 도서관 여자 사서(司書) 한 명이 반대해 여태 우리의 귀중한 보물이 못 돌아왔다. 규장각 관장인 내가 반대하는 한 규장각 도서는 절대 프랑스로 갈 수 없다. 무슨 일이 있어도 막겠다.”

한 때 그는 지독한 어려움을 겪었다. 1986년 그는 당시 군사정권에 반대하는 서울대교수 서명운동에 참여, 당국으로부터 곱지 않은 시선을 받게 됐다. 그가 느끼기엔 교수생활을 더 못하게 되는 것 아닌가 할 정도였다. 가정적으론 남편이 하던 목장이 부도가 났다.

그 유명한 소파동 때문이었다. 부도로 빚잔치를 마친 그의 가족은 성남의 단칸방으로 이사를 가야 했다. 수도물이 안 나오고 연탄을 때야 하는 집이었다. 동네에 우물이 있었지만 새벽 3시나 되야 차례가 돌아왔다.

서울대학교수 정옥자는 새벽 3시에 물동이를 들고 물을 퍼날랐다. 그가 이런 고생을 한다는 사실은 3년 뒤에나 동료교수들에게 알려졌다. 그의 고생은 얼마 전 겨우 끝났지만 그는 “새벽 3시에 물을 푸면서 내 학문에 문리가 트였다. 그 전까지는 단지 나는 지식을 지닌 사람일 뿐이었다”고 말했다.

그 역시 정조대왕처럼 현실의 고난을 학문으로 뚫은 사람이라는 말을 전하고 싶어 그가 쓰지 말아달라고 당부한 그의 사생활 일부를 소개했다.

편집국 부국장

soo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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