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화단의 살아있는 전설 운보(雲甫) 김기창(金基昶ㆍ88) 화백은 27일 충북 청원군 내수읍 형동리 `운보의 집'에서 눈물을 흘리며 목에 건 묵주와 십자가를 벗어 쓰다듬었다.동생 기만(基萬ㆍ71)씨가 북측방문자 명단에 포함됐다는 소식에 부축없이는 제대로 몸을 가누지도 못하는 운보는 수화로 “반갑네. 평생 기다리던 소식이야”라면서 격정을 이기기 힘든 듯 두 눈은 어느새 촉촉이 젖어들었다.
“6년전 편지를 보내온 것 만도 고맙고 고마운데 죽기 전에 만날 수 있을 지는 몰랐어.” 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청각장애인이라는 이유로 납북을 모면했던 운보는 처와 당시 서울시립미술연구소 연구생이던 셋째 동생 기만씨 등과 전북 군산 처가로 피란을 떠났다.
“그때 폭격을 받아 길이 갈렸지.” 운보는 피란길에 헤어진 세 동생이 모두 죽은 줄만 알았다. 19세 어린 나이에 모친을 여읜 후 운보가 자식처럼 길러온 동생들이었다. 운보는 군산 구암동에서 동족상잔을 회개하고, 민족의 구원을 염원한 듯 `예수의 일생' 연작을 시작, 신들린 듯이 1년여만에 30여점을 완성했다.
91년 북한을 다녀온 한 정치인으로부터 동생들이 모두 살아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94년에는 중?m 인 시인으로부터 그리던 동생 기만씨의 편지를 건네받았다. “언제나 잊지 못하고 뵙고 싶던 형님에게 연로하신 몸, 건강에 주의하시면 우리 형제가 머지않아 기쁜 상봉을 하리라 확신합니다.
형님 그림 `정청(靜廳)'에 모델노릇을 했던 막내 여동생 기옥(基玉)이는 의사가 됐어요.” 56년 평양미술대학을 졸업하고, 미술가동맹 중앙위원으로 30여년간 활동, 공훈미술가로 성공한 기만씨는 마치 “형님 제가 이만큼 컸어요”라고 말하듯 `환희의 아침' `국화' 등 작품 다섯 점도 함께 보내왔다.
95년에는 기만씨의 작품 20여점을 서울로 들여와 `형제작품전'을 열었다.
하지만 작품을 통한 재회가 도리어 안타까웠던지 운보는 전시회 직후 뇌졸중으로 쓰러져 붓을 놓고 투병생활을 해왔다.
아들 완씨는 "죽기 전에 동생들을 봐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셨는데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면서 "상봉을 예견하셨는지 얼마 전부터는 부축을 받아 정원 나들이도 하시는 등 기력을 회복하시는 것 같다"고 기뻐했다.
안준현기자 dejavu@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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