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한국의 사상 흐름/윤건차 지음/당대 발행한국의 새 천년은 희망과 함께, 극복해야 할 혼돈으로 밝았다. 세기말의 성찰을 제대로 마무리할 겨를도 없이 IMF 사태로 사회 전반의 안정이 무너지는 와중에 기존 사상에 대한 회의와 새로운 대안에 대한 갈증으로 몸살을 앓는 형국이다. 시대의 흐름을 읽고 발언해야 할 지식인들은 악전고투 중이다.
일본에서 나고 자란 동포 학자 윤건차(尹健次·56·가나가와대 교수)는 90년대 한국 사상의 국면을 `혼미기'로 규정한다. 그의 책 `현대 한국의 사상 흐름-지식인과 그 사상 1980~1990년대'는 한국 사상의 좌표를 꼼꼼하게 읽어 낸다.
광주학살의 참상 이후 좌절과 희망의 양극단을 오간 `혁명의 시대' 1980년대부터 2000년 6월까지를 다룬, 한국 현대사상의 최신 지형도라고 할 수 있다. 초점은 1990년대에 맞춰져 있다. 지은이는 식민지 지배와 전쟁, 분단, 군사 파쇼, 고도의 경제성장을 숨가쁘게 겪은, 흔히 `압축근대'로 표현되는 한국 현대사가 지식인의 사유에 남긴 상처 혹은 자랑스런 궤적을 애정을 갖고 들여다본다.
현대사상을 총체적으로 파악하려는 그의 노력은 날카로운 비판을 겸하고 있다. 요즘 ~ 거론되는 유고자본주의나 아시아적 가치론은 껍데기 이론일 뿐 아니라 정치적으로 기득권층을 옹호하는 수구적 논리라고 지적한다.
서구합리주의의 한계를 동양사상의 재발견을 통해 극복하려는 최근의 탈근대 논의도 그의 화살을 비켜가지 못한다. 예컨대 들뢰즈 사상과 선불교를 접합시키려는 이정우에 대해 “탈근대 지향의 프랑스 사상 연구가 왜 한국의 식민지근대를 지나쳐서 고대까지 질주해 버렸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한다.
지은이는 한국 지식인의 이념적 성향을 분류한 나름의 지도를 그려내고 있다. 보수와 진보, 좌파 내부의 미세한 차이에 따른 스펙트럼, 급진적인 것부터 반동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대표적 지식인 60여명을 분류한 이 표는 논쟁을 불러일으킬 불씨를 품고 있다.
지은이의 분류에 동의하든 안하든, 한국 지식인의 좌표를 일별하는 점에서 일단 가치가 있다. 더욱 바람직하기는 그것이 생산적 논쟁을 거쳐 새로운 사상을 낳을 수도 있다는 점이다.
지은이는 이 책을 쓰는 동안 “압축근대의 한국에서 지식인은 무섭기조차 한 고뇌를 켜켜이 쌓아왔으며 더욱이 거듭되는 좌절을 극복하고 어려움에 정면으로 맞서고자 하는 진지한 자세를 지녔다는 사실을 통감했다”고 말한다.
또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같은 피나는 노력이 실제로 사상의 풍요를 낳았는가 하면 꼭 그렇지만은 않다고 지적한다. 그는 올 4ㆍ13총선에서 나타난 57%의 최저투표율과 진보정당의 참패로부터 `진보적인 사상과 사회현실 사이의 상당히 큰 균열과 낙차'를 확인한다.
그의 분석에 따르면, “한국의 진보진영은 60년대 이후 군사정권의 개발독재 내부에서 성장했으며 이들의 체제~m 판ㆍ체제파괴의 힘은 80년대 후반 들어 가장 강력해졌다. 그러나 동구사회주의권 몰락의 충격으로 90년대 이후에는 일종의 답보상태에 빠졌으며 2000년에 접어들어서도 여전히 새로운 시대의 전개에 대응할 수 없는 심각한 혼미기에 있다.”
지은이는 맺음말에서 한국 현대사상이 안고있는 문제점을 네 가지로 정리,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그것은 식민지성의 이해와 근대의 극복, 다양해진 사회 현실 속에서 역사 주체의 설정, 미래지향적 시각에서 국민 개념의 재구축과 남북 민중과 해외동포를 포함한 민족적 공동체에 대한 관심, 남북 통일과 동아시아 민중의 공존을 시야에 넣은 아이덴티티의 창출이다.
이 책의 가치는 한국 현대사상의 최근 20년을 정리한 최초의 저술이어서만은 아니다. 그보다는 지식인의 사명과 역할을 일깨우면서 지은이가 재일동포로서 한국 지식인들에게 보여주는 동지적 애정이 더욱 감동적이다. 지난달 출간된 일어판을 장화경이 옮겼다.
오미환기자 mh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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