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대선이 최악의 혼전이라지만 유권자들을 사로잡을 만한 열전은 아니다. 선거가 집약된 국민 관심사를 보여주지 못할 뿐 아니라 선거를 통해 미국의 국가적 이슈가 무엇인지 드러나지도 않는다. 2000년 미국선거의 특징을 말하라면 쟁점이 없는 선거라는 게 가장 맞다. 선거에 쟁점이 없다는 것은 유권자들이 선거에 무관심하다는 말도 된다.우리 선거였다면 신문들은 `극도의 혼전, 유권자는 냉담'이라고 제목을 달만한 양상이다. 2000년의 미국사회가 선거이슈가 없을 만큼 정돈돼 있을 리가 없다. 다만 사람들의 관심이 `문제'들에 가 있지 않은 현상으로 봐야 할 것이다.
두어 달 전 서울에 주재하는 한 미국외교관에게 선거에서 누가 이길 것 같으냐고 물은 적이 있다. 주저 없이 그가 꼽은 승자는 민주당의 앨 고어였다. “경제가 너무 좋고, 앞으로 선거를 가름할 만한 이슈가 없다”는 게 그 이유였다.
선거일을 2주도 안 남긴 지금의 양상은 대체로 그의 예측과 크게 다르지 않은 셈이다. 그러나 이슈가 없다 보니 가장 큰 변수의 자리를 차지한 게 인물론이고, 이 때문에 뚜렷한 이유도 없는 지지율의 혼전을 보이는 것이 조금 다르다.
미국 선거가 이렇게 흘러가는 데에는 그 외교관이 굳이 표현하지 않은 다른 한 가지의 요인이 더 있다. 1990년대 냉전종식 이후 초강대국으로 부상한 미국 중심의 일극(一極)체제가 그것이다.
미국민들을 자극할 만한 국제적 위협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세계질서, 그것이 선거를 싱겁게 만들고 있다. 경제는 잘 나가고 적(敵)은 사라지고... 아마도 태평성대를 맞은 시기에 미국은 대통령을 뽑는 것인데, 바로 이 때문에 대통령은 누가 돼도 상관이 없다는 생각이 상당수 국민들에게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비롯되는 또 다른 특징적 현상 중의 하나는 외교정책에 대한 극도의 무관심이다. 세계를 주도하는 나라에서 국제문제에 대한 관심이 뒷전으로 밀려 있다는 것은 일단 흥미로운 현상이다. 물론 대외정책은 국민의 무관심에도 불구하고 책임을 가진 담당엘리트가 펼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대중의 무관심은 표가 결정력을 갖는 정치권으로 유입되고, 정치권은 다시 대외정책 분야에 정치적 이익이 없어 이를 외면하는 풍조가 생겨나고 있다면 이건 얘기가 다르다. 브루킹스연구소의 선임 연구원 제임스 린지는 최근 `포린 어페어즈(Foreign Affairs)'에 기고한 글에서 이런 분석을 내놓으면서 이를 `신종 무관심(The New Apathy)'이라고 표현했다.
린지가 인용한 갤럽의 조사에 따르면 냉전기간 중 미국의 가장 중요한 국가적 과제로 대외정책을 꼽은 국민들은 항상 10~20%, 또는 그 이상을 차지해 왔다. 반면 오늘날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불과 2~3%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의회에 영향을 끼치거나, 의원들이 주의를 기울이는 요인들은 역시 쉽게 표와 직결되는 이익단체 등의 로비세력이라는 얘기이다. 이런 경향들이 계속 악화하는 바람에 상원의 외교위원회와 하원의 국제관계위원회는 소속의원 정수를 확보하는 데만도 적지 않은 애로를 겪는 실정이라고 린지는 지적하고 있다.
또 하나 파생되는 중요한 문제는 미국의 대외정책이 갈수록 당파성에 함몰된다는 것이다. 대외정책이 국민적 관심사에서 멀어질수록 각 정파는 보편적, 초당적, 또는 애국적 관점을 파쟁적 이유로 도외시, 정치수단화할 뿐이라는 것이다.
칼 폰 클라우제비츠가 `전쟁론'에서 말한 것처럼 `외교는 다른 수단에 의한 내치의 연장'이라는 바로 그 원리가 작금의 미국의 현실인 셈이다.
이 모든 현상은 따지고 보면 풍요와 풍만이 빚는 역작용들이다. 이를 두고 한 선거전문가는 이렇게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지금 미국의 풍요는 가장 강력한 마약과도 같다.”
조재용 국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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