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시(詩)의 큰 봉우리인 미당(未堂) 서정주(85) 시인이 모국을 떠난다. 10일 63년을 해로해 온 부인 방옥숙(方玉淑) 여사가 세상을 떠난 뒤 기력이 쇠한 미당을 돌보고 있는 큰며느리는 25일 전화통화에서 “날짜는 정해지지 않았지만 곧 출국하실 것”이라고 말했다.큰아들 승해(升海)씨 등 두 아들이 다 미국에 거주하고 있는 미당은 이번에 출국하면 다시 돌아오기는 힘들 것으로 보여 사실상 영구 이주가 될 전망이다.
방옥숙 여사가 타계하기 전까지 노부부는 29년을 살아온 서울 관악구 남현동 예술인마을 자택에서 두 사람이 단란하게 지냈다.
민족 전래 단군신화의 웅녀(熊女) 이야기에 나오는 쑥과 마늘에서 이름을 따 봉산산방(蓬蒜山房)이라 이름붙인 집이었다.
지난달 14일 타계한 황순원 선생의 부음을 전할 차 봉산산방을 찾은 기자에게 미당은 “서럽습니다…”라는 말만 되풀이하며 “곧 지병인 심장병 치료차 의사인 아들이 있는 미국 노스 캐롤라이나로 갈 것”이라고 말했었다.
당시만 해도 노부부는 식탁에서 함께 맥주를 마시는 평화로운 모습이었다. 하지만 동갑인 황순원 선생의 부음에 미당은 적잖이 놀라는 기색이었고, “서럽다”는 말에서 여러 회한 어린 감정도 숨기지 않는 것 같았다.
한국 현대 시사의 가장 높은 봉우리이자 살아있는 증인이면서도, 친일 시비 등 구설이 끊이지 않은 채 쓸쓸히 노년을 보내고 있는 시인의 심정이 그 말에는 배어 있었다.
방여사가 타계한 후 미당은 한때 위독한 지경에까지 처했다가 조금씩 원기를 회복하고 있지만 외부 사람들을 만날 수 있을 정도는 아니라고 가족들은 전했다.
시단의 후학들은 미당의 출국 소식에 안타까워 하면서 그와 관련된 자료들을 정리하는데 힘을 쏟고 있다.
그가 재직했던 동국대 측은 미당의 봉산산방 자료들을 그의 고향인 전북 고창군에 있는 미당문학기념관에 기증하기로 하는 한편, 일반인들이 소장하고 있는 미당 관련 자료도 수집하고 있다. 이근배 시인은 “가족도 없이 외롭게 한국에 혼자 남아계실 수도 없다.
하지만 한국문학의 가장 큰어른을 이렇게 떠나보내야 한다는 사실이 너무 안타다”고 말했다.
모국과 모국어를 떠나야 하는 심정을 미당은 “서럽다”는 한 마디로 표현했지만, 떠나는 것을 보아야 하는 이들의 심정도 마찬가지일 것 같다.
하종오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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