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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에세이 / "아빠 라면솜씨 끝내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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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에세이 / "아빠 라면솜씨 끝내주네"

입력
2000.10.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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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에 일을 나갔다온 아내는 꿈속에 든 지 오래일 때, 큰 아들이 학원에서 귀가했다. 꽤나 시장했는지 컴퓨터 앞에 매달려 있던 제 동생에게 라면 좀 끓이라며 재촉을 했다. 작은 놈은 군말없이 주방에 나와 라면물을 올려놓는데 그 순간 TV를 보다 말고 나도 한몫 거들고 싶어졌다. “물이 끓기 전에 미리 라면을 넣으면 쉽게 끓일 수 있고, 양파 대파와 함께 어묵과 애호박도 함께 넣으면 아주 얼큰하고 짬뽕보다 더 맛있는 라면을 먹을 수 있다”고 일러 주었다.그런데 큰아들 놈이 “라면에 무슨 호박과 어묵을 넣느냐. 물이 끓기 전에 라면을 넣으면 불어서 안된다”며 시큰둥해 하는 것이다. 마음같아선 “아비가 일러주면 배울 것이지 그러느냐”고 일갈해주고 싶었지만 그것도 세대차라 할까봐서 그냥 지켜봤지만 직성이 풀리지 않아 팔을 걷어부치고 나섰다. 내 식대로 물이 끓기 전에 미리 라면을 넣고, 냉장고를 뒤져 파 호박 어묵 등을 준비했다가 라면이 끓기 시작할 때 노병의 40년 라면 역정을 과시하듯 듬뿍 털어 넣었다.

그러니까 내가 처음 라면을 먹어본 것은 1966년으로 기억된다. 15원이었던 당시 라면을 아껴먹기 위해 반절로 나눠야 했고 밥 한덩이를 넣고 끓이면 꿀맛같던 군대시절이었다. 한겨울 바닷?바람에 파카점퍼를 둘러입고 뱃전에서 보초를 서던 새벽 두세시쯤이었다.

배가 몹시 고팠던 나는 근무장소를 나와 함(艦)내 사관식당에 잠입, 라면을 끓였다. 그 때 뒤에 찬바람이 느껴져 돌아보니 `치외법권'적 권위의 함장님께서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고 계셨다. 사색이 된 얼굴로 모든 것을 각오하고 있을 때 함장님께서 싱긋 웃으시며 “그렇게 배가 고프냐”며 “어서 끓여 먹고 치워라”고 하시고 문을 닫고 가시는 것 아닌가. 그때만큼 라면 맛이 좋았던 때가 그 후론 없었다.

집안이 온통 라면냄새로 진동하는 가을밤, 우리 삼부자 이야기 소리에 잠을 깬 아내가 실눈을 치뜨며 시샘하듯 나와서는 도왔다. 자정이 넘은 시간 라면 한 냄비 끓여 놓고 네가족이 둘러 앉아 먹었다. 자식들은 “야, 아빠라면 솜씨 끝내준다”며 탄성을 질렀다.나도 34년만에 먹어본 가장 맛있는 라면이었다. 하지만 라면맛보다 더 좋은 것은 깊은 밤 오랜만에 도란도란 피우는 얘기꽃이었다.

이대규

경기 수원시 권선구 고색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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