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유목민들을 야만족이라 했는가구소련제 12인승 미니버스는 길도, 표지판도 없는 초원 사이를 달리며 나즈막히 솟아난 구릉 사이를 용케도 헤집고 나아갔다. 1시간쯤 지났을까, 동승한 오치르 소장(몽골 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이 손가락으로 초원 끝 먼 곳을 가리킨다.
눈을 돌려보니 아주 작은 물체가 한낮의 햇빛을 받으며 반짝이고 있었다. 목표를 확인한 몽골 기사는 운전대를 잡은 손에 더욱 힘을 주며 페달을 밟아댔고, 점차 비석의 몸체가 분명히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몽골의 수도 울란바토르에서 서남쪽으로 약 300km 정도 떨어진 곳, 현지명으로는 '호쇼 차이담'이라 불리는 이곳에는 두 개의 커다란 비석이 있다. 19세기 말 이 비석의 존재가 처음으로 세상에 알려졌을 때 거기에 새겨진 문자들은 이제까지 누구도 보지 못했던 것들이었다.
다행히 힌트는 있었으니, 그 중 하나의 비석에 '고궐특근지비'(故闕特勤之碑)라는 제목 아래 한문으로 된 긴 비명이 새겨져 있었던 것이다. 이를 통해 이 비의 주인공이 지금부터 1300년 전 북방초원에 거대한 제국을 건설했던 유목민 돌궐(突厥)의 한 왕자였음을 알 수 있었고, 이 미지의 문자도 그들의 언어 즉 투르크(Turk)어를 나타낸 것임이 판명되었기 때문이다.
돌궐비문의 내용은 그로부터 불과 1년만인 1893년 덴마크의 빌헬름 톰센이라는 천재적인 학자에 의해 해독되었다.
`궐특근(闕特勤)'. 그의 이름은 투르크어로 `퀼 테긴'이었다. 그는 카간(유목군주의 칭호)이었던 숙부가 유목민의 관행을 무시하고 어린 아들을 후계자로 임명한 것에 반발하여 숙부가 사망한 뒤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러나 스스로 카간이 되지 않고 자기 형에게 그 자리를 양보했으니, 이렇게 해서 즉위한 인물이 빌게 카간이었고 그는 바로 호쇼 차이담에 남아있는 또 하나의 비문의 주인공이다.
이 두 형제의 비석의 존재가 알려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울란바토르 남쪽 40km 지점에 또 다른 비석이 발견되었는데 이는 톤육쿡이라는 노재상(老宰相)을 위해 세워진 것이다. 퀼 테긴의 정변이 몰고 온 숙청과 처형의 광풍에서도 살아남은 그는 제국건설의 장본인이자 동시에 빌게 카간의 장인이기도 했다. 앞의 두 비석은 주인공들이 사망한 뒤에 세워진 것에 비해, 이 비석은 그 생전에 스스로의 공적을 과시하기 위해 세운 것이니 그 영향력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퀼 테긴, 빌게 카간, 톤육쿡. 이 세 사람의 비문의 발견은 몽골리아 초원을 무대로 활동하던 고대 유목민들에 대한 우리의 눈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그때까지 유목민들에 관해 알려면 한문으로 된 중국측 기록을 통해서 뿐이었다. 그들에 대해 적대적인 태도를 갖고 있던 중국인들의 글 속에 투영된 유목민의 모습은 예의 염치를 모르는 잔인한 야만인에 불과했다.
고도로 발달된 도시문화와 관료체제, 인간의 사고와 행동을 규제하는 복잡한 도덕체계로 무장한 중국인들이 볼 때 성곽도 없이 가축을 치며 옮겨다니는 그들의 생활은 거칠고 천박하기 짝이 없었고, 시도 때도 없이 약탈이나 자행하는 그들의 행태는 `인면수심(人面獸心)'이라 불러 마땅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비문들은 중국을 거치면서 왜곡된 기록이 아닌, 유목민의 생생한 육성을 들려주었다. 그들이 소중하게 생각했던 것이 무엇이고, 두려워했던 것이 무엇인가. “하늘과 같고 하늘에서 생겨난 나 투르크의 빌게 카간, 이제 카간의 자리에 올랐노라.
너희들은 내 말을 단단히 듣거라!” 이렇게 시작되는 빌게 카간의 비문은 초원의 구릉 위를 쓸고 지나가는 바람처럼 당당하게 우리를 향해 소리치고 있다. 비문은 무엇보다도 고대 유목민들이 그들 자신과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주변의 세계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는가를 잘 보여준다.
그런데 거기에 나타난 그들의 세계관은 중국인들의 `중화'를 중심으로 하는 일원주의적 천하관과는 너무나 대조적인 것이다.
우선 그들의 독특한 방위관념이 눈길을 끈다. 흔히 우리가 동→서→남→북이라 하는 것과 달리 그들은 동→남→서→북이라는 순서를 따른다.
이것은 다름아닌 태양이 동쪽에서 떠서 진행하는 방향을 나타낸다. 그들은 천막을 칠 때도 문을 언제나 동쪽으로 열어 놓았고, 아침에 해가 뜨면 밖으로 나와 해를 향해 세 차례 큰 절을 올렸다고 하는데, 이 역시 그들의 태양숭배를 입증하고 있다.
태양은 그들이 최고의 신으로 여겼던 `탱그리(Tangri)' 즉 `천신(天神)'을 상징하는 존재였다. 태양의 운행을 중심으로 하는 그들의 방위관념은 `해가 뜨는 곳(동)' `해가 한 가운데인 곳(남)' `해가 지는 곳(서)' `밤이 한 가운데인 곳(북)'이라는 표현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비문은 돌궐제국의 창건자가 사망했을 때 조문사절을 보내온 각국의 명단을 열거하고 있는데, 이 명단의 순서 역시 동→남→서→북으로 되어 있다. 즉 동방의 고구려에서 시작하여 남쪽으로 중국과 티베트, 이어 서쪽으로는 동로마가 나오고, 마지막으로 북쪽으로 키르기즈와 거란 등이 언급되어 있다.
그들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주변의 나라와 민족들을 정치적인 친소나 지리적인 원근에 따라 배열하지 않고, 태양의 운행에 기초한 독특한 세계관에 따라 정열시킨 것이다.
이 비문에는 고구려도 등장한다. 고대 돌궐인들이 남긴 여러 비문들을 조사해 보면 해가 뜨는 동방에 `뵈클리(B kli)'라는 이름의 나라가 등장하고 있고, 이 나라는 모두 두번 언급될 뿐이다. 한번은 앞서 말했듯이 조문사절을 보낸 나라의 하나로, 또 한번은 돌궐인들이 당나라를 도와 `뵈클리'에 대한 원정에 참가했다는 내용이다.
`뵈클리'라는 말의 어원에 대해서는 아직 학계에서도 의견이 분분하지만, 이것이 고구려를 나타낸다는 점에 대해서는 거의 이의가 없는 편이다.
그런데 주목할 점은 고구려의 군주가 비문에서 `뵈클리 카간'이라는 명칭으로 불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카간'이란 최고의 군주를 나타내는 투르크말로서 한자로 옮기자면 `황제'에 비견되는 칭호이다.
황제가 `천명'을 받아 천하의 질서를 주관하는 존재이듯이 카간 역시 `탱그리의 명령'과 `탱그리의 축복'을 받아 `위로는 푸른 하늘, 아래로는 누런 땅' 사이에 있는 `사람의 아들들'을 다스리는 존재로 여겨졌다. 그러나 고대 유목민들은 `하늘에 두 개의 태양이 있을 수 없듯이 지상에 두 명의 황제가 있을 수 없다'는 식의 중국인들의 정치관념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은 돌궐제국의 군주 뿐만 아니라 중국, 고구려, 티베트, 키르기즈 등 주변의 나Xm 를 지배하는 군주들도 `카간'이라는 칭호로 불렀기 때문이다.
이처럼 중국인들이 황제의 지배권을 받아들이지않는 주변의 민족들을 `야만인'이라고 규정했던 일원적인 세계관을 표방했던 것과 달리, 투르크인들은 다른 지역 문화 국가 민족들이 나름대로의 독자적인 정치적 질서와 문화적 특징을 지니는 존재로 인정하고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그들은 다원주의적 세계관의 소유자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세계관은 비단 비문을 남긴 돌궐인들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유목민들 모두에게도 적용될 수 있다.
따라서 유목민들의 이러한 정치적.문화적 유연성은 그들이 다른 문화와 접촉할 때 개방적인 태도로 수용할 수 있도록 해주었고, 그들이 건설한 제국 안에서 여러 이질적인 문화가 서로 공존하며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
몽골리아 초원에 남아있는 비석들은 그동안 중국인들의 기록을 통해서 우리에게 각인된 '유목민은 잔인하고 미개한 문명의 파괴자'라는 이미지를 벗겨내고, 오히려 그들이 자신과 동등한 정치적 실체를 인정하고 서로 다른 민족과 문화의 공존을 인정하고 장려하는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을 웅변으로 말해주고 있다.
김호동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
협찬 삼성전자 아시아나항공
■이동가옥 '게르' 이젠 여행자도 반겨
몽골 유목민들의 이동가옥은 게르. 양털, 낙타털을 두들겨 납작하게 편 뒤 흰 천을 붙여 만든 것이다. 게르는 지금도 초원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있으며 수도인 울란바토르에도 많다.
내부 면적이 대개 5~6평이지만 큰 것은 10평이나 된다. 들어가서 오른쪽편으로는 간이 부엌이 있어서 여자들이 조리를 한다. 난방은 쇠똥이 나 나무를 이용하는데 쇠똥은 열량이 높을 뿐 아니라 냄새도 없다.
최근엔 유목민들이 다른 곳으로 옮겨가면서 쓰레기를 잔뜩 버리고 가는 것이 문제가 되고 있다. 간단한 생활 쓰레기가 배출되던 옛날과 달리 요즘은 자동차 바퀴, 냉장고까지 버려져 쓰레기 산을 이룬다.
여행자를 위한 게르도 많다. 여행자용 게르는 일본인들이 본격적인 몽골여행을 시작한 20여년 전 등장했다. 여행사에 미리 부탁하면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는데 식사비를 포함, 우리 돈으로 하루에 5,000~1만원이면 묵을 수 있다.
역사에세이 기행팀이 묵었던 카라코룸의 우그데이 여행자 숙소에는 게르 10여개 동이 있다. 샤워기가 있는 등 시설도 좋은 편이다. 사방 어디를 보아도 맑고 푸른 하늘과 넓은 초원이 펼쳐져있다. 밤에는 주먹만한 별들이쏟아질 듯 하고 새벽에는 말이 사각사각 풀 뜯는 소리가 잠을 설치게 한다.
박광희기자 khpar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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