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성조시여. 명나라가 망해 나라가 바로 서고 이제사 독립국이 되니, 천운을 내리사 조선제국의 뜻을 이루게 하소서. 이 나라가 일인지하 만인지상 제왕의 나라임을 만방에 고하겠나이다. 이 광해, 제왕의 자리에 오르게 하소서. 굽어 살피소서.” 광해군의 어조가 자못 비장하다.조선왕조의 임금 중 반정으로 폐위, 조(朝)나 종(宗)의 존호 대신 군(君)이라는 이름으로 누대의 조롱을 받았던 두 사람이 극적으로 재현된다. 극단 서전이 `천년제국 1632년'로 광해군을 진취적 자유주의자로 복권시키면, 극단 연우무대는 `이(爾)'로 연산군의 이불을 들춰낸다.
역사의 상식을 삐딱하게 바라 보는 `천년제국 1632년'은 이 연극은 바로 그 해, 광해군이 축출되던 인조반정 당시 궁중의 암투와 저승을 오간다. 광해군이 꿈결에서 허균을 만나 이상국가에 대해 논하는 장면은 이 연극이 사실의 재현을 넘어 선, 메타 사극임을 말해준다.
광해군과 허균의 대립, 소수 엘리트 대 다수 민중, 엘리트 국가 대 율도국이라는 유토피아의 길항이 그것이다. 지배 계층과의 갈등, 외세와의 싸움 등 광해군의 새로운 면모를 보여 줄 무대다.
이상국가 건설의 꿈이 발각난 허균이 광해군에게 능지처참 당한 5년 뒤가 배경이다. 광해군은 대신들의 권력 쟁투에 휘말려 형제를 죽일 수 밖에 없었다는 것, 결국 백성들에게 외면당하는 임금이 되고 말았다는 사실이 치밀한 대사에 실려 나온다. 역사의 진실을 끝까지 고집하던 사관은 광해군을 폐하려는 반정군의 칼에 팔이 잘리고 만다. 이 연극은 팔 없는 노사관으로 여닫는다.
`조선왕조신위'의 작가 차근호 작, 박계배 연출. 박경근 이재원 서민정 등 출연. 27~11월 12일까지 동숭홀. 화~금 오후 7시 30분, 토 오후 4시 7시 30분, 일 오후 4시. (02)762-0010
폭군 연산군의 악다구니는 극한으로 치닫는다. “내 아비 성종같이 성군이 되길 바라겠지? 그 성군이 사랑하는 여인에게 사약을 내린다더냐? 그것이 성군의 도란 말이냐? 저잣거리 장사치들의 간사함만도 못 하고, 무지렁이들의 비굴함만도 못 한 것이 성군의 도란 것이다.
으하하하!” 중신들을 모아놓고 면전에 퍼붓는 소리다. 극단 연우무대는 `이(爾)'로, 권력의 극단적 허무주의를 보여준다.
그의 일탈 중 복잡다기한 성적 편력을 주제로 잡았다. 연산과 남자 광대 공길 간의 동성애적 행각이 핵심이다. 이(爾)란 왕이 신하를 높여 부르는 말. 연산이 공길을 부르던 말이다. 동성애적 행각은 물론 등줄기에 채찍을 내려치는 등 연산이 공길에게 했던 새디즘까지 암시된다.
대신이 지켜보는 가운데 공길이 연산의 애첩 녹수와 마찰하는 경회루 연회 장면, 장면 전환 사이 극중극 등이 특히 볼거리다. 등장인물이 서로를 흉내내는 광대놀이, 장님놀이, 서로 옷을 벗기고 입혀주는 놀이 등 전통악기 연주속에 펼쳐지는 갖가지 놀이 장면들은 오늘날 새롭다.
김태웅 작ㆍ연출. 김내하 김진경 오만석 등 출연.11월 18~28일 문예회관대극장. 월~금 오후 7시 30분, 토ㆍ일 오후 4시 30분 7시 30분 문예회관대극장. (02)764-8760
장병욱기자 aj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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