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근무형태로는 피로가 누적돼 승객의 안전을 책임질 수 없었다.”23일 밤 대한항공 조종사 노조 이성재(李成宰) 위원장이 얘기한 파업 이유다.'안전을 책임질 수 없었다니…' 등골이 오싹할 지경이다. 목숨걸고 비행기를 탔던 `국민'들은 신혼여행이 무산됐든, 사업계약을 못하게 됐든 이제라도 안전비행이 가능해 졌다니 쌍수를 들어 환영이라도 해야 할 판이다.
올 6월 사상초유의 파업을 감행한 의료계는 `국민보건을 위해' 언제 끝날지 모르는 눈물겨운 투쟁을 무려 넉달이 넘도록 계속하고 있다.
최근들어 봇물을 이루고 있는 전문직 종사자들의 집단행동에는 공통점들이 있다. 모두가 `국민'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일어선 일어섰고, 근무환경 개선이나 돈 문제도 모두 `국민'을 위해서다. 수 십년간 곪은 상처를 방치해오다 집단행동을 불러 온 정부, 기업들도 `국민'을 내세우기는 마찬가지다.
하지만 정작 국민은 어디에도 없다. 공항에서 발이 묶인 1만여명의 승객, 세 명 중 한 명 꼴로 치료를 받지 못한 채 생사를 넘나드는 암환자 등… 현장에서 만난 국민들의 반응은 하나같이 냉소적일 뿐이다.
22일 조종사 파업집회가 열렸던 고려대 한켠에는 평생 비행기 한 번 탈 수 있을지 모르고, 병원은 언제 가봤는지 기억조차 희미한 야학생과 교사들이 모?여 `야학 한마당'을 열었다. 돈이 없어 3년 만에 성사된 이 모임 도중 한 교사가 물었다. “고용불안에 떠는 비정규직 노동자가 절반을 넘고, 모두들 `IMF 때보다 더 하다'고 한숨만 내쉬는데, 저 사람들이 말하는 국민은 도대체 누굽니까?”
안준현 사회부기자 dejavu@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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