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깊은 산 속에 있는 절은 고요와 아름다움이 물씬 몸에 밸 듯 했습니다. 하늘은 더없이 높아 투명했고, 바람은 갓 태어난 듯 티없이 맑았습니다. 골짜기 물은 얼마나 깨끗한지, 겁(劫)의 세월을 견디었을 바위들마저 청초한 듯 반가웠습니다. 단풍, 그 슬픈 아름다움은 굳이 이를 바도 아닙니다.스님의 독경소리가 절 마당에 들어서기 전부터 자연의 본디 소리인양 들리고 있었습니다. 저는 잔뜩 긴장을 한 채, 조용히 그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향해 갔습니다.
세월을 짐작할 수 없이 오랜 법당 안에서 노스님이 목탁을 두드리며 독경을 하고 계셨습니다. 햇빛이 들지 않아 안은 좀 을씨년스러웠지만 마음도 몸도 가라앉기 좋은 아늑함이 있었습니다.
스님의 독경이 언제 끝날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그 뒷자리에 가부좌를 하고 앉았습니다. 별로 크지 않은, 그리고 별로 잘 만들어졌다고 할 수도 없을, 부처님이 흰 색으로 좀 높은 곳에 계셨습니다.
문득 한 사나이가 떠올랐습니다. 아무 것도 부족하지 않은 삶, 아쉬운 것이 없는 삶, 바라는 것을 모두 할 수 있고, 모두 부러워하는 삶을 살고 있던 젊은이, 그런데 무릇 사람들의 삶이 다 그런 것이 아니라 고통에 찌들어 멍든 것이 삶임을 알고, 그 늪에서 사람들을 건져내지 않으면 안되리라고 생각한 그 젊은이의 고뇌, 그래서 집을 떠나 스스로 고행의 길에 들어서는 모습, 그리고 마침내 번뇌의 근본이 스스로 짓는 욕심에서 비롯한 것을 알고 그 줄을 끊고 허허하게 삶을 직시해야 비로소 더 고통에 시달리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삶, 그래서 사람된 한 젊은이.
저는 노스님의 가냘픈 어깨를 바라보았습니다. 깎은 머리가 아예 번뇌라고는 깃들일 곳이 없노라고 말하듯 깨끗한데, 어떤 가슴 찢어지는 아픔이 있어 여기 이 산 속에서 이렇게 삶의 얼룩을 닦아 내고 계신지 문득 떠오른 한 사나이의 고행과 터득의 상(像)이 겹쳐지면서 저도 모르게 눈을 감았습니다.
제 삶의 온갖 일들이 급한 바람에 실려 제 앞을 지나고 있었습니다. 어릴 때 친구의 얼굴이 휙 지나가고, 이제는 기억조차 희미한 선친의 모습도 커다란 선회를 하며 지나갔습니다.
사랑했는데 이제는 없는 친구도 웃으며 바람 따라 급하게 왔다가 그렇게 급하게 사라졌습니다. 뜬눈으로 지샌 아픈 새벽도 그 바람 속에 있었습니다. 바람 속에서 모든 것이 오고 또 갔습니다.
그 바람 속에 또 다른 젊은 사나이가 있었습니다. 가진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는, 한 번도 사람대접도 받지 못한, 배운 것도 없고 힘도 없고 장가도 못간 젊은이, 자기는 스스로 사람의 아들이라고 하는데 옆에서 따라다닌 사람은 그를 당신이야말로 신의 아들이라고 고백했던 그런 사람, 배고프면 먹여주어야 하고, 아프면 낫게 해주어야 하고, 억울하면 풀어주어야 하고, 잘 못하면 질책해야 하고, 그래서 서로 사랑하고 또 사랑해야 한다고 말한 소박한 젊은이, 그래서 잘난 사람들이 불손하다고 잡아죽인 젊은이, 그런데, 죽어 오히려 살아 천년의 세월보다 더 긴 세월을 살아있는 젊은이.
이윽고 바람이 멈추고 모든 것이 잠잠해졌습니다. 그 때쯤 노스님의 독경이 끝났었는지, 아니, 거기 여전히 앉아 계셨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제 속에서 앞의 젊은이가 서서히 사라지고, 뒤의 젊은이도 그렇게 사라지고 있었습니다. 눈을 떴을 때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을 만큼 잿빛이 깔리고 있었습니다.
뒤늦게 떠나 돌아오는 긴 여정은 매연과 휴대폰 소음과 술 냄새와 젊은 연인들의 행복한 모습과 늙은 아낙의 깊은 주름과 창문에 비친 제 낡은 모습으로 채워졌습니다. 하지만 독경의 여운은 아직 마음속에 머물고 있었습니다.삶은 아직 절망하기에는 이릅니다.
정진홍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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