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징에서 상하이는 터콰이처(特快車·급행열차)로 왔다. 시속 120km.로 달려 3시간 30분 걸렸다. 상하이는 하루가 달랐다. 날로 새롭고 달로 달랐다(日新月異). 중국을 승천하는 용이라면 상하이는 용머리에 해당하는 곳이라 하겠다.상하이박물관은 설립(1952)된 지 7년 만에 확장이전하였다가 현재 위치인 상하이시 인민정부 앞 인민광장에 새 건물을 짓고 1996년 10월 개관하였다. 소장유물은 12만여 점이고 이것을 21개 분야로 분류하여 전시하고 있다. 청동기 도자기 서예 회화 등 좋은 유물이 많다.
높이가 30m나 되는 박물관 건물은 천원지방형(天圓地方型 : 하늘은 둥글고 땅은 모가 났다는 사상을 바탕으로 한 모양)인데 사방에서 보이는 모습이 달라 흥미롭다. 내부는 11개의 일반 전시실과 3개의 기획전시실로 구성되었다. 도서관 매점 식당 귀빈실 표구연구실 기획실 등도 다 갖췄다.
다른 박물관과는 달리 상하이박물관은 1년 행사내용(특별강좌와 특별전 등)을 미리 관람자들에게 알리고 적극적인 참여를 유도하고 있었다. 올 강좌에는 21명의 연구원이 발표를 하고, 특별전은 5번(화조화전ㆍ유리예술전ㆍ내몽고문물전ㆍ화폐전 등) 할 예정이다.
이 박물관의 많은 청동기 가운데에서도 춘추시대 유물인 수면문용류합(獸面紋龍流盒)은 형태가 독특하고 무늬나 보존상태, 크기(높이 30츠 길이 39cm) 등이 다 좋은 고동기(古銅器)다. 이 박물관의 자랑거리이다.
상하이박물관의 도자기 전공 학예원인 루밍화(陸明華)씨는 9월 중순 요대도자예술(遼代陶瓷藝術)에 대해서 강의할 예정이라면서 4세기 동진 시대 유물인 흑자반구사이호(黑瓷盤口四耳壺 : 네 귀 달린 흑자 항아리)를 크게 자랑했다.
"안정된 기형, 완벽한 대칭, 섬세한 기술 등이 월주요(越州窯)의 높은 도자예술 수준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보존상태도 양호합니다.”
이 항아리는 2층의 중국 고대 도자관에 잘 모셔져 있에? 다. 1층에서 4층까지 모든 진열실을 다 보고 나오면서 시설ㆍ관리ㆍ유물ㆍ관람객 등에 큰 부러움을 느꼈다.
베이징에서 루쉰박물관을 본 감동을 안고서 상하이의 루쉰기념관을 찾았다. 루쉰공원 안에서는 이른 아침이어서 남녀가 어울려 운동도 하고 춤도 추고 있었다.
깡마른 모습의 루쉰 동상(전신 좌상) 뒤에는 그의 무덤이 있다. `루쉰 선생의 묘'(魯迅先生之墓)라는 글씨는 마오쩌둥 주석이 쓴 것이다.
공원 정문의 동쪽에 있는 기념관은 베이징에 있는 박물관보다 훨씬 크고 좋았다. 1999년 9월 25일 루쉰 탄생일 기념으로 새로 ?확장개축하였기 때문이다. 지하층과 지상 2층 연면적 4,683㎡의 큰 건물에 각종 현대식 설비를 다 갖췄다. 문물창고 진열실(5개) 학술보고실 귀빈실 영사실 서랑(書廊) 등이 있다.
문학가며 혁명사상가였던 루쉰(1881~1936)은 짧은 인생을 살았지만 중국인들의 가슴 속에서 영원히 살고 있기 때문에 그의 박물관과 기념관은 베이징 상하이 샤오싱 꽝저우 등 여러 곳에 있다. 그 가운데 이곳 상하이의 루쉰기념관이 제일 잘 되어 있다.
특히 1층의 조화문고(朝華文庫)와 2층의 서랑이 아주 좋다. 조화문고는 루쉰이 사귀고 사랑했던 중국 현대 문인 광핑(許廣平) 천왕따오(陳望道) 시아쩡농(夏征農) 장꽝니엔(張光年) 황위엔(黃源) 리췬(力群) 자오스(橋石) 왕지(王琦) 등의 집필실을 재현한 방이다. 방마다 그들의 장서 친필원고 편지 사진 문방사보 문헌 등이 있었다. 일종의 현대문학기념관인 셈이다.
2층의 서랑도 아주 독특했다. 중화 민족정신의 결정인 루쉰을 온 인민과 정부가 기념하고 연구하고 홍보하는 이유를 알 수 있는 방이다. 그의 저작물, 그와 관계된 도서, 그의 글이 실려 있는 400여종의 서적이 좌우 두 벽에 8층으로 부착진열되어 있다. 이곳을 지나가면서 그의 넓고 깊은 정신세계와 중국인들의 존경심을 이해하게 된다. 위대한 선지선각자와 참다운 후지후각자의 아름다운 모습이다.
상하이의 중심지에서 동북쪽에 있는 루쉰공원을 떠나 서남쪽에 있는 쑹칭링위엔(宋慶齡陵園)으로 갔다. 이곳에는 쑹칭링 묘, 쑹칭링 부모 묘, 외국인 묘(萬國公墓), 쑹칭링 소상(塑像), 기념관, 상하이 아동박물관 등이 함께 있다. 이곳은 중국에 있는 백개애국주의교육시범기지(百個愛國主義敎育示範基地) 중의 하나이며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 중의 하나다.
쑹칭링 명예주석의 유해가 베이징에서 화장된 후 유골이 이곳에 안장된 것은 1981년 6월이었고, 정식으로 개방된 것은 7월 1일부터였다. 19년 전 일이다. 앞쪽 길도 쑹원로(宋園路)로 고쳤다. 그만큼 그를 앙모하기 때문이었다.
이 능원은 4개 부분으로 조성되었다. 쑹씨 집안 묘지 중심지역(묘ㆍ념광장ㆍ쑹칭링 소상ㆍ기념비ㆍ쑹칭링 사적 기념관 등), 중국인 묘역, 외국인 묘역, 소년아동활동구(아동박물관 등) 등이다.
이 능원을 참관하고서 한없는 감격을 느꼈다. 먼저 전체적으로 조경의 조화미와 균제미가 뛰어난 데 감탄했다. 나무와 꽃, 잔디, 건물 등이 참으로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기념관의 규모와 내용도 인상적이었다. 베이징에
있는 기념관보다 더 크고 더 충실했다. 쑹칭링이 자신의 보모 리이앤아(李燕娥)에 보여준 사랑과 존경에 감동했다.
쑹칭링은 자기를 50여 년 간이나 살펴주고 보호해 준 보모가 자기보다 3개월 먼저 1981년 2월 죽자 묘를 쑹씨 묘지에 만들 것과 자기도 보모 옆에 묻힐 것을 유언으로 남겼다. 석관의 모양과 크기까지 자기 것과 같게했다. 쑹칭링은 남편인 쑨원의 묘(난징의 쭝산릉)에 합장되지 않고 부모와 보모 곁으로 간 것이다.
이 묘지 앞에는 화강석을 깐 광장(80×36m)과 백색 대리석의 쑹칭링 소상이 있다. 이 소상은 1984년 1월 세워졌으며, 전체 높이 3.6m의 잘 만들어진? 전신좌상이다. `애국주의ㆍ민주주의ㆍ국제주의ㆍ공산주의의 위대한 전사(戰士) 쑹칭링 동지 영수불후(永垂不朽)'라고 덩샤오핑(鄧小平)이 쓴 기념비가 그 앞에 있다.
허영환 성신여대 교수ㆍ문화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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