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웅크린 희망 깨워준 외딴방은 꿈의 공간"서울 구로구 구로동은 이제 생산 기지가 아니라 유통 단지이다. 2공단은 라코스테 티셔츠나 파코라반 양복 같은 많은 메이커들의 할인 매장이 들어 서 있다. 이곳이 공장지대 였을 때는 많은 사람들이 늘 `안'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유통단지가 된 이곳에는 사람들의 분주한 발걸음 때문에 실제보다 많은 이들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
“햇볕까지 너무 밝아진 느낌이다. 작가의 눈에 이곳은 더 이상 기억 속의 개봉동이나 구로동이 아니었다. 길은 넓어졌고, 사람들이 많아졌다. 예전 이곳에선 이처럼 많은 사람을 본 적이 없다. 그들은 언제나 `안'에 있었다. 공장 컨베이어 벨트 앞이나 그들의 작은 방에 있었다.
그 때문인지, 열여섯부터 스물까지의 시간을 `동남전기'에서 보냈던 작가 신경숙은 그의 `외딴 방' 을 찾지 못했다. “이쯤 `보리밭 사진관'이 있었는데, 그리고 작은 골목길을 들어서면 집이 있고, 거기서 디자인 포장센터 굴뚝위로 떠오르는 달이 보였는데”
서울시 금천구 가산동 42번지. 그가 살았음직한 집의 주소는 그렇게 변해 있었다. 더 이상 개봉동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집을 찾지 못했다. 그 때의 느낌은 그의 내면에 숨어 있는 듯 했는데, 번지나 집들은 기억하질 못했다. “?여긴 것 같은데” 그는 연탄불을 먼저 붙여 주었던, 문신을 가진 친절한 사내가 운영했던 구멍가게의 건너편을 자신의 집이라 어렵게 기억해 냈지만, 그 집은 계량기가 13개 달린 다세대 주택으로 변해 있었다.
서른일곱 개. 한 집안에 들여 놓기엔 너무나 많은 숫자였지만 '개미집'이라고, `벌집'이라고도 불리는 그 공간에는 그 때 그렇게 많은 방이 있었고, 그 안에는 집을 떠나 막 `산업 역군'이 된 소녀나 소년, 아가씨나 청년들이 살고 있었다.
'경고/ 절도범은 검거와 동시에 전도난품목 변상이 부과됨을 경고한다. 주인백'(98.7.1), `화장실 청소는 세입자 101호부터 216호, 내실 1, 2 호 순서로 1일 청소를 부탁 드립니다. 주인 백' (1991.5.23)
금천구 가산동의 `벌집'엔 유난히 '공고' 가 많다. 보증금 500만원에 월세 16만원이라는 빈방 공고가 있는가 하면, 구청에서 몰래 카메라를 설치했으니 쓰레기를 무단 투기하지 말라는 엄포도 있었다. 집은 집이지만 이 집은 많은 사람들이 `공유'한 집이었다. 집에서는 규칙을 말로 하지만 이곳에선 `글'로 한다. 그것이 집과 `집이 아닌 집'과의 차이점이다. 이 많은 공간을 가진 주인은 그러나 거기에 살지 않는다. `외딴 방'의 주인이 그러했듯 이 주인의 전화번호 역시 경기도 어딘가이다.
그가 동남전기에 다닐 때 이곳엔 주로 공장에 다니는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왠지 와보고 싶지 않았다. 편치 않았다. 작품에서 다 말을 했는데 굳이 다음에 또 장소를 찾는다는 것도 그렇고. 한 방송사에서 동행취재를 하자는 요청이 있었으나 하고 싶지 않았다. 요즘엔 방 값이 싸다는 이유로 집을 나온 아이들이 살고 있다는 소리도 들었다.”
그가 동남전기에 다니던 시절처럼 여전히 변치 않는 것이 있다면 여인숙이다. 작은 방이 다닥다닥 붙어있고, 방 앞에 `곤로(풍로)'를 내어 놓고 밥을 끓여 먹었다. 이제 이 작은 골목엔 여인숙이 세 개나 된다. `러브 호텔' 같은 용도는 아니다. 주로 한 두 달씩 기거하는 사람들이다. 중국에서 온 노동자로 보이는 부부가 아이 둘을 데리고 누추한 짐을 이끌고 `벌집'을 찾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 발걸음엔 낯선 곳에 대한 경계와 그만큼의 설렘이 묻어 있었다. 그들에게 이곳은 낡은 기억의 창고가 아니라 현재 진행형인 꿈의 공장이다.
구로동이 재중동포에게 새로운 꿈의 장소가 된 것은 그리 오래 전 일이 아니다. 협소한 난전들이 오밀조밀 모여 있던 개봉 시장은 이제 번듯한 상점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눈길을 끄는 것은 중국식 간판이다. `중국 최신 인기곡 다량 입수, 북경 노래방', `용정 미식가 반점' `가장 싼 전화카드, 중국 35분에 1만원' 개봉 시장은 이제 중국 어딘가처럼 중국 말과 노래, 음식들로 성시를 이루었다. 시장 한편에도 중국 당면이며, 중국 고추장을 파는 전문 부식 가게들이 늘어서 있다. 3, 4년 전부터 중국 산업 연수생들이 늘면서 새로 생긴 풍경이다.
70년대, 혹은 80년대 구로동의 꿈이 `주경야독으로 꿈을 일깨우는' 여성 근로자들의 무대였다면, 혹은 그들이 자조하는 `공순이' 들의 꿈의 유배지 였다면 이제 구로동은 서울의 또 다른 `차이나 타운' 인 셈이다.
주말이면 그는 이른 목욕을 하고 빨래를 하고 김치를 담궜다. 회식이 끝나면 디스코텍에도 몰려 가고 했지만 작가는 그러지 않았다. 작가에겐 방이 있었다. 그곳엔 오빠와 사촌언니가 있었다. 모두들 집에서 떨어져 나와 `생산의 에? 군'이 되고 고립된 노동자가 되어 갔지만 작가는 언제나 가족들과 함께 있었다. 그는 일하고 책을 읽거나 집안 일을 거들었다. “그 때는 불행한 줄 몰랐다. 지금도 그 때가 불행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곳에서 우리는 정말 건실하게, 건강하게 살았다”
`동남전기' 가 자리잡았던 구로 2동 3공단은 공장들이 사라지고 있다. 정성 들여 설계한 듯한 아파트형 공장이 들어서고 있다. 언뜻 오피스텔이라 불러도 좋을 만큼 세련된 건물이다. 조퇴를 하고 공장을 나올 때 인적이 그토록 드물었던 공장 터에는 이제 인부들이 부지런한 손길을 움직이고 있다.
개봉동의 몇 가옥을 빼놓고, `공단'을 구성하던 많은 것이 바뀌었다. 소녀들이 아닌 주부들이 공단의 주요 노동자가 됐고, 어린이 보육 시설도 생겨났다. 그렇다고 아예 `외딴방'에서 꿈을 키우던 소녀들이 다 사라진 것도 아니다. 단지 그들은 이 유통단지가 아닌, 또 다른 생산 기지의 작은 방으로 거처를 옮겨갔을 뿐이다. 세상 한 편엔 언제나 외딴 방이 있고, 그곳엔 행복도 불행도 아닌 중성의 삶, 그 삶으로 지친 몸을 누인 우리 누이들이 있다.
글=박은주기자 jupe@hk.co.kr
줄거리
`이제 열여섯의 나. 노란 장판이 깔린 방바닥에 엎드려 편지를 쓰고 있다. 오빠. 어서 나를 여기에서 데려가줘요. 그러다가 편지를 박박 찢어버린다.' 나는 떠나고 싶었다.
”나 모르겠니, 나, 하계숙이야” 첫 장편 소설을 출간하자 `그 때' 영등포여고 동창 하계숙이 전화를 걸어온다. 그는 79년부터 81년까지 나와 함께 학교를 다녔던 `그녀' 중의 하나이다.
그녀들을 어떻게 만났던가. 추수를 마친 날 밤, “편지말고 다른 글을 쓸 것”이라 다짐해온 나는 카메라로 “새를 찍는 사람이 되겠다”던 외사촌과 함께 서울에 온다. 동사무소 숙직을 도맡아 하면서 집 없이 살고 있던 오빠와 우리 둘은 함께 살게 된다. 구로1공단 동남전기주식회사. 우리 둘은 스테레오과 A라인의 1번과 2번이 되어 어느덧 능숙하게 에어드라이버를 다루며 하루 일당 칠백얼마를 받게 된다. 산업체특별학급에 다니며 나의 꿈은 대학에 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노조가 생겨나면서 분위기가 달라졌다. 잔업거부 같은 일은 전에라면 생각도 못했던 것이다.
소설 쓰는 나에게 영등포여고의 한교사가 편지를 보내왔다. 야간반 학생들에게 나의 경험이 도움이 될 수 있으니 와서 강연을 해달라는 요지였다. 나는 왠지 그럴 용기가 나지 않았다. 삼풍백화점이 무너졌다. 그곳서 살아남은 소녀의 얼굴 같은 것을 전에 본 적이 있다.
공장에서 양장점으로 일자리를 옮긴 희재 언니, 적금 이백만원만 타면 재단사와 결혼을 할 거라고 했던 그녀는 왜 `그 부탁' 을 나에게 했던 것일까. 결국 나는 그녀 부탁대로 문을 잠금으로써 그녀 자살의 마지막 임무를 수행했다. 열아홉의 나는 얼마간 말을 잊었다. 오빠가 취직을 한 후 형편이 나아지면서 나는 대학입시를 준비하게 된다.
그러면, 옛날 일을 쓰는 현재의 나는 이전의 나와 어떤 관계일까. `이 글은 사실도 픽션도 아닌 그 중간쯤의 글이다. 이것을 문학이라 할 수 있을까. 글쓰기를 생각해본다. 내게 글쓰기란 무엇인가? 하고.'
약력
▦ 1963년 전북 정읍 출생
▦ 서울 구로공단에서 근무
▦서울예대 문예창작과 졸업
▦ 1985년 문예중앙 신인문학상에 `겨울 우화' 로 등단
▦ 소설집 `강물이 될 때까지'(1990) `풍금이 있던 자리' (1993) `오래 전 집을 떠날 때' (1996), 딸기밭(2000년), 장편 `깊은 슬픔' (1994), `외딴 방' (1995) `기차는 7시에 떠나네' (1999), 산문집 `아름다운 그늘' (1995)
▦ 제26회 한국일보 문학상(1993), 제1회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1993), 제40회 현대문학상(1995), 제11회 만해 문학상(1996), 제28회 동인문학상 수상(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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