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대통령의 노벨평화상 수상이 발표된 13일, 재일동포 지휘자 김홍재(46)는 처음으로 한국 땅을 밟았다. 오랜 소원이었지만 올 수 없었다. 그의 국적 아닌 국적 `조선적(籍)' 때문이다. 대한민국 국적을 택하지 않고 일본에 귀화하지도 않은 조선적 재일동포는 정확히 말해 무국적자이다. 남북 분단을 인정할 수 없었던 그의 아버지는 한일수교 이전 재일동포의 국적인 조선적으로 남았다. 조선적은 사회생활에 여러 가지 불이익이 있을 뿐 아니라 남한에서는 북한계로 여겨져 경계의 대상이 된다. 조선적이기 때문에, 그는 한국에 오고 싶어도 올 수 없었다.국내에서 그의 이름은 낯설다. 일본에서는 다르다. 일본의 양대 지휘자상인 사이토 히데오상(1979)과 와타나베 아키오상(1998)을 모두 받고 아사히 TV와 NTV의 클래식 프로그램을 맡고 있는 지휘자인 그를 누구나 안다. 특히 외국인으로서 일본 최고 지휘자에게 주어지는 와타나베 아키오상 수상은 일본 음악계를 뒤흔든 사건이었다. 아사히신문은 3일간 그를 대서특필했고, NHK도 그를 집중취재했다.
김홍재는 아셈을 축하하는 예술의전당 10월 음악축제에 초청돼 20일 KBS교향악단을 지휘한다. 이날 저녁 7시 30분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열리는 음악회에서 윤이상의 `무악'과 부조니의 ~P? 아노협주곡(협연 백건우)을 연주한다. 분단의 희생양이었던 윤이상의 음악을 한국 데뷔 프로그램으로 고른 것이다.
윤이상은 그에게 특별한 의미를 갖고 있다. “윤이상 작품 연주를 필생의 과업으로 삼고 있다”고 말한다. 90년대 초부터 매년 1~2곡씩 모두 12곡의 윤이상의 작품을 일본에서 초연한 것을 포함해 지금까지 20여곡의 윤이상 작품을 연주했다.
“1986년 일본 산토리홀 개관 기념공연에서 윤이상 선생의 음악을 처음으로 객석에서 듣고 감격했습니다. 윤이상 선생은 서양 악기로 동양의 우주관과 생명관, 미학을 표현한 위대한 음악가입니다. 서양 오케스트라에서 어떻게 이런 색깔을 나오는가에 놀랐고, 그가 같은 핏줄인 데 감격했지요.”
그때의 충격으로 그는 중대한 음악적 전환기를 맞게 된다. 윤이상을 찾아 90년대 초반 독일 유학을 떠난 것이다. 도쿄시필하모닉에서 10년, 나고야필과 교토시교향악단에서 각각 3년씩 상임지휘자를 맡아 지휘자로서 쌓은 탄탄한 경력을 접고 떠날 만큼 절실한 선택이었다. 그는 독일에서 윤이상의 제자가 되어 2년간 배웠다.
그는 “무엇보다 윤이상의 인간성에 큰 감명을 받았다”고 했다. “윤이상 선생은 항상 자신의 작품을 통해 인류애를 담았습니다. 끝내 고향(경남 통영)에 돌아오지 못하고 죽었지만, 그는 조국의 평화와 통일을 염원하고 그것을 위해 활동했던 사회적 예술가입니다. 나도 예술가로서 그의 정신을 계승해나가야 겠다고 생각했지요.”
분단의 굴레를 몸으로 겪고 있는 재일 조선적 음악가로서, 그는 음악으로 민족 화해를 실천하는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 80년대부터 `한겨레 콘서트'로 qm 일 한민족의 화합을 도모해왔으며 남북 정상이 만나기 닷새 전인 6월 8일에는 도쿄에서 통일음악회를 가졌다. 87년 교토시교향악단을 이끌고 북한의 평양ㆍ원산ㆍ함흥 순회공연을 했고 90년 평양에서 범민족 통일음악회를 지휘하기도 했다.
식민지배와 분단으로 굴절된 한민족의 역사는 그의 음악에 남다른 철학과 의지를 부여한 것으로 보인다. 1980년 아사히 TV의 클래식 프로그램 `오케스트라가 왔다'를 맡고서 그가 연주한 첫 곡도 `아리랑'이었다.
오미환기자 mh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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