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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세이-유라시아 천년 / (5)'중국의 중화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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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세이-유라시아 천년 / (5)'중국의 중화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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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10.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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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족출신 군주가 '중화주의' 첫 표방중국을 여행할라치면 누구에게나 다가오는 인상은 넓은 땅과 많은 사람들일 것이다. 그저 사람이 많은 것이 아니라 얼굴 색, 체격 표정 등도 가지각색이다. 56개의 민족이 중화인민공화국이라는 국명아래 이렇게 모여 살고 있다.

한족(漢族)이란 것도 실제 역사상 동아시아 주변에서 활동한 거의 모든 종족의 부단한 융합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라면, 중국이란 하나의 거대한 인종시장임에 틀림이 없다. 그들은 `중화민족'을 모든 소수민족을 포함한 `통일적 다민족'이라고 풀이하고 있다. 중국의 공식적인 국명은 `중화인민공화국'이다. 중국인들은 그들이 `중화'임을 대내외에 표방하고 있는 것이다. 중국인에게 아직도 이렇게 깊게 각인되어 있는 중화주의란 도대체 무엇인가.

중국 고대인의 세계관을 이야기할 때 흔히 드는 것이 중화주의이다. 고대 중국인들은 자기들이 활동하고 있는 지역과 바깥 세계를 어떻게 구별하여 인식하고 있었을까? 자기 세계의 확인은 바로 바깥 세계에 대한 규정이기도 하다.

전통시대 중국에는 민족의식이 없었으며 그것에 눈뜬 것은 서양의 자극에 의해서qm 다고 지적되고 있다. 따라서 이 중화주의란 민족주의 그 자체는 아니다. 중국의 역사는 통일과 분열, 융합과 분리를 거듭하는 사연도 많은 것이었지만 중화라는 기치아래 꾸준히 모여들었고, 세계 각처에 흩어져 살고 있는 화교들은 몇 대가 지나도 모국어를 잃지 않고 중화민족임을 자처하고 있다. 중화주의는 이렇게 강한 흡인력을 가진 중국인의 신화인 동시에 현실이다.

중국인의 세계관은 `중국'이란 말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중국이란 사국(四國)의 대칭어로서 여러 조각의 성읍국가에 둘러싸인 중심국가를 의미하였다. 이후 영토국가로 이행한 춘추전국시대(B.C.770 -221)가 되면서 중국은 그 지역적 범위가 확대되어 황하중류지역, 즉 중원을 지칭하게 되었다.

그렇다고 중국이 국가의 이름이거나 지역 명칭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었다. 특정 생활공간과 문화를 공유하는 역사공동체를 가리킨다. 중국 자체에 우월한 문명을 지닌 세계중심이라는 의미가 들어있다. 스스로 천하의 주인으로 여긴 고대 중국인들은 문명과 중심이라는 두 가지 잣대로 자기(화 華)와 주변(이 夷)을 엄격하게 구분했다. 이것이 화이사상(華夷思想)의 요체다.

이런 화이사상에 입각한 세계질서는 통일제국인 한대(B.C.205-A.D 220)에 와서 책봉-조공체제가 확립됨으로써 나름으로 완비된 모습을 갖추게 된다. 세계는 크게 내와 외라는 두 지역으로 나누어지고 각각에 서열도 만들어졌다.

세계질서가 그렇게 유지되고 있다는 자기 중심적인 인식과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희망이 섞여 만들어진 이념형이다. 중국 천자가 작위적으로 만든 이런 이념적 세계질서는 현실적으로 적용되는 것은 아닐지라도 중국인의 세계인식인 동시에 당시의 현실을 어느? 정도는 반영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런 화이사상에 기반한 세계인식이 출현한 것은 무엇보다 자기 위치에 대한 과신과 당시의 지리인식의 한계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그런 만큼 이후의 역사전개과정에서 적지 않은 장벽을 만나지 않을 수 없었다.

중국 천자의 천하지배는 만천하에 널리 펼쳐져야 한다는 이상과는 달리 현실적으로 그 한계에 봉착했다. 군사적 침공 등을 통해 사방을 천자의 질서 속에 편입시키기 위해서는 엄청난 경제력과 군사력의 소모를 가져왔다. 여기에 비중국을 통어하는 타협적인 수단으로 등장한 것이 바로 `고삐를 느슨하게 잡되 관계를 끊지 않을 뿐'이라는 소위 '기미(羈?)'정책이다. 세계의 중심인 중국에 들어와서 그 질서에 동참하는 자는 받아들이되 굳이 채근할 것까지는 없다는 것이다.

더군다나 진한시대의 등장으로 중국에 통일왕조가 성립한 이후 그 영토의 반 이상 또는 전체가 이적에 의해 점령된 기간은 700년 이상에 달하였다. 특히 그들을 점령했던 자들은 중국을 둘러싼 사방의 이민족 가운데 문화적 수준에서 가장 낮다고 멸시한 북방의 유목민이었다.

특히 오호족(匈奴 鮮卑 저 羌 鞨)에 의해 문명의 땅인 화북을 최초로 점령당한 오호십육국-북조시대(A.D.303-589) 280여년간은 중국인에게는 대단한 충격이었다. 오호출신 군주들은 중국인 고유의 조상인 황제(黃帝) 혹은 염제신농씨(炎帝神農氏)의 후예라 칭하면서 한족 정통을 물려받은 남조인을 오히려 `섬오랑캐(島夷)'라 멸시하였다. 이런 시대가 지속되자 기존에 견지해왔던 화를 중심으로 하는 화이론적 세계관의 변화는 불가피하게 되었다.

특이한 것은 바로 이처럼 화와 이의 위치가 뒤바뀐 시기에 `중화'라느? 용어가 처음 출현했다는 사실이다. 그 전까지는 성좌의 이름에 불과하던 중화라던 명칭을 이민족 출신 군주가 처음으로 `중화군주'라는 용어로 사용했다. 중국 역사상 진정한 의미의 중화주의의 실현은 이들로부터 시작된다. 오호족이 중원을 지배하기 전과 후의 중국인의 세계인식은 달라졌다.

이어 한대에는 흉노 선우(單于)에게 통치되는 장성 이북의 `활쏘는 나라(引弓之國)'와 한나라 황제에게 통치되는 장성 이남의 `의관을 정제한 나라(冠帶之室)를 명백하게 구분하게 되었다. 반면 당대(A.D. 618-907)의 중국인들은 황제가 자식처럼 이적을 대하게 되니 북방의 호족과 남방의 월족이 한족과 함께 한 식구를 이루는 `호월일가(胡越一家)'가 되었다고 했다.

이 시대 이민족계통의 군주들이 스스로를 중화군주로 자처했던 것은 화와 이의 종족적 구별을 넘어 중국 내에 모여든 모든 종족을 포용하는 군주임을 대내외에 표방했다는 의미이다. 왕자(황제)의 교화를 입어 스스로 중국에 편입되어 의관에 위엄이 있고, 효제(孝悌)하며 몸소 예의를 행하면 중화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당 태종의 말을 빌리자면 이런 국면은 중국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 결과 당의 수도 장안에는 서역 한반도 일본 월남 등에서 온 외국인 수만명이 거리를 활보하고 다녔지만 중국인으로서 굳이 국경을 넘은 자는 별로 없었다. 이들 외국인들은 기존의 중국인들과 힘을 합쳐 대당(大唐)의 화려한 문화를 일구어 내었고, 세계를 호령하는 제국의 강력한 힘의 한 축을 이루었다.

호한(胡漢)혼혈과 합작의 결과로 출현한 세계제국인 당대에 이르러 형성된 중화적 세계관인 중화주의는 이민족에 의한 중국의 통치마저 정당화하는 논리적 함정을 안고 있다?. 덩치 큰 중국이 소수민족정권에 쉽게 정복당한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러나 이 중화주의는 이후 왕조에서도 다소의 변화는 있었지만 결코 포기되지 않았다. 예를 들어 민국 초기 중국은 한족만의 단일국가가 아니라 오(漢.滿.蒙.回.藏)족으로 대표되는 다민족국가이며 이들이 공화국의 국민으로서 평등한 지위를 누린다는 소위 `오족공화론'의 논리도 여기에서 발원한 다. 또 중화인민공화국 헌법 전문에 `대민족주의(大漢族主義)를 반대하는 동시에 지방민족주의(少數民族主義)도 반대해야 한다'고 못박고 있는 것도 이 중화주의와 무관하지 않다.

민족주의를 표방하면서도 `세계의 중심'이라는 전통적인 문명주의를 초탈하지 못한 중화주의는 지난 100여년간 중국이 겪은 굴욕의 원인이 되기도 했지만, 오늘날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21세기는 중국의 세기가 될 것이라 예상토록 만드는 요인이라면 과도한 독단이라 할까.

영어로 `검은 양'(black sheep)'은 `집단이나 가족 중에 따돌림 당하는 사람'을 일컫는다. 검은 색의 이미지가 서양에서 나쁜 것과 일맥상통하는 단어이다.

그런데 중국에서 `검은 양'은 지도자의 상징이다. 7월7, 8일 베이징(北京)에서 네이멍구(內蒙古) 자치주를 다녀오는 길에서 그 현장을 목격했다.

네이멍구까지는 GM사의 성능좋은 밴을 타고도 10시간 가량 걸리는 힘든 여정이었다. 차가 베이징 북쪽 허베이(河北)성 풍닝(豊寧)을 지나고 옌산(燕山)산맥을 넘자 끝이 보이지 않는 푸른 초원이 눈에 들어왔다. 그 너른 풀밭에는 소, 말, 염소, 양 등 온갖 가축들이 방목돼 있었다. 그 중에서도 가파른 산의 중턱까지 올라가 있는 양과 염소는 멀리서 보기에는 푸른 산에 하얀 솜을 걸쳐놓은 것 같았다.

그런데 가만히 살펴보니 염소와 양 떼의 가장 앞 자리에는 검은 녀석들이 있었다. 산자락은 물론 평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검은 놈들이 걸어가면 하얀 놈들이 따라 걸어갔고 검은 놈들이 방향을 틀면 하얀 놈들도 함께 방향을 틀었다. 그러고 보니 목동들도 약속이나 한 듯 다들 검거나 짙은 색 옷을 입고 있었다.

재중동포 가이드 이동희(李東羲ㆍ35)씨는 “검은 염소나 검은 양이 무리의 우두머리”라고 설명했다. 주민들은 “목동들은 염소와 양의 그런 심리를 이용, 녀석들을 잘 몰고 다니기 위해 일부러 짙은 색 옷을 입는다”고 했다.

중국의 경극에서는 얼굴에 검은 색을 칠하면 `용맹한 사람'을 상징한다.

글 박광희기자 khpar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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