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투표는 가장 민주적인 제도다. 나라의 중대사를 국민이 직접 찬반으로 결정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 직접 민주주의 제도에 별 감흥을 갖고 있지 않다. 과거 독재·군사정권들이 국민투표를 정권관리의 유효한 수단으로 이용했던 탓이다.■최근 여야 영수회담때 김대중 대통령이 남북관계 진전과 관련, 지나가는 말로 국민투표를 언급해 정가에 미묘한 파장을 불러 일으켰다. 청와대가 해명해 파장은 수그러 들었지만 여운은 가시지 않고 있다. 국민투표에는 두가지 종류가 있다. 대통령이 필요하다고 인정될때(헌법 72조)와 헌법개정의 절차(헌법 130조)로서의 국민투표가 있다. 이런 합헌적 당위에도 불구하고 과거의 국민투표에 대해 정당했다고 보는 사람들은 별로 없는 듯 하다.
■가장 최근의 국민투표는 87년 10월27일 실시된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에 대한 것이다. 이야말로 ‘10월 항쟁’의 산물로 정당성을 갖췄다고 할 수 있다. 그보다 앞선 것은 80년 10월22일의 5공 헌법개정안에 대한 것. 이 헌법에 의해 5공 군사정권이 출범했다. 그 전 것은 75년 2월12일에 실시된 국민투표.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유신헌법의 존속여부와 자신의 신임을 묻겠다면서 느닷없이 국민투표를 결정했다. 속셈은 유신정권의 정당성 강화였다. 그때 DJ와 YS가 선두에서 국민투표 거부운동을 벌였으나 역부족이었다. 그 이후 유신독재는 더욱 강화됐고, 결국 10·26 사태를 초래했다. 문제의 유신헌법 역시 72년 11월21일 실시된 국민투표의 산물이다.
■국민투표 관련 신문 기사철을 뒤지면 재미있다. 72년 아버지와 나란히 투표장에 나온 박근혜씨의 앳된 모습과 젊은 총리 JP의 투표 모습이 신문에 실려있다. JP는 75년 국민투표때도 총리였다. 그는 당시 일본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정권이 오래되면 독재화의 우려가 있다’는 질문을 받고 다음과 같이 답변했다. “박 대통령은 독재자가 아니다…한국에는 많은 신문과 방송국이 있다. 독재자라면 그렇게 허용할 것인가.” 맞는 말일까? 유신시대의 총리가 공동여당의 지도자이고, 그때의 대통령 딸이 야당 부총재라는 현실이 공교롭기는 하다.
이종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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