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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통령 노벨평화상 / 민주화.인권을 향한 긴 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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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통령 노벨평화상 / 민주화.인권을 향한 긴 여정

입력
2000.10.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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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느 새 이불 속에서 `하느님 아버지'를 부르면서 마구 울고 있었습니다. 눈물이 하염없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러다 지쳐서 잠이 들었습니다.”1981년 2월 `내란음모 사건'으로 청주 교도소에 수감중인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이 부인 이희호(李姬鎬) 여사에게 보낸 옥중 서신의 한 구절이다.

80년 `서울의 봄'이 신군부에 의해 무참히 짓밟혔고, 자신은 내란 음모로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 이후 들끓는 국제 여론으로 무기로 감형된 당시 심경은 `울고 지쳤다'는 표현으로 압축된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지금 김 대통령은 대통령으로서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앞이 안보이던 캄캄한 80년대 초, 지치고 절망적이었지만 강압과 회유에 굴복하지 않았다. 김 대통령의 인생 역정은 `인동초'(忍冬草)라는 별칭처럼 고난과 이를 견뎌 내는 의지의 자취들로 점철돼 있다.

민주주의와 인권을 향한 김 대통령의 긴 여정은 1971년 대통령 선거 후 시작됐다. 그 이전에도 그에게는 시련과 고난이 끊이질 않았다.

하의도 섬소년의 꿈, 청년 해운업자로의 성공, 3ㆍ4ㆍ5대 국회의원 선거의 연속된 실패, 첫 부인인 차용애(車蓉愛) 여사와의 사별, 5대 인제 보궐선거에서의 천신만고 끝 당선, 곧바로 이어진 5.16 쿠데타, 의원직 박탈, 투옥, 이희호 여사와의 결혼, 6.7대 국회의원 당선, 70년 신민당 대선후보, 71년 대선의 석패등등. 그러나 이 일들은 다분히 야당 정치인 김대중 개인의 문제였다.

71년 대선 후부터는 박정희(朴正熙) 당시 대통령에 실존하는 위협이 됐고 민주화의 상징이 됐으며 가혹한 탄압의 대상이 됐다. 투옥과 연금, 살해 위협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저항하면서 재야 인사, 민주 투사의 길을 걷게 된다. 김 대통령은 박정희 정권에서 신군부 정권에 이르는 기간 동안 55차례의 가택연금, 6년여의 옥고, 2차례의 망명을 감수하면서 4차례 죽을 고비를 넘긴다.

72년 유신정권이 출범하면서 민주 인사에 대한 모진 탄압이 시작되고 아들인 김홍일(金弘一) 의원도 고문을 받는 등 가족과 주변이 물리적 폭력에 고통 받게 된다.

특히 일본 망명 중인 73년 8월 도쿄의 한 호텔에서 중앙정보부에 의해 납치 당해 동해에 수장당할 뻔한 위기도 겪었다. 김 대통령은 그 순간 “나는 국민들을 위해 아직 못다한 일이 많습니다”라며 살려달라는 기도를 했다고 밝힌 바 있다.

이처럼 무지막지한 테러에도 김 대통령은 굴하지 않았다. 74년 민주회복 국민회의에 참여하고 76년 `3ㆍ1 민주구국선언 사건'을 주도, 긴급조치 위반으로 5년형을 선고 받고 수감된다. 78년 12월 석방됐으나 다시 연금된다.

79년 10월 26일. 박정희 전 대통령이 살해되고 연금해제, 사면복권 조치를 받는다. 대학가에는 민주화 열망이 넘치고 야당은 전열을 정비했다. 그러나 `서울의 봄'은 짧았다. 쿠데타를 일으킨 신군부는 민주 세력에 가혹한 탄압을 가했으며 80년 5월 `내란음모사건'을 조작, 김 대통령에게 사형을 선고한다. 김 대통령은 유언이나 다름 없는 최후 진술에서 “이 땅에 민주주의가 회복되면 먼저 죽어간 나를 위해 정치 보복이 다시는 행해지지 않도록 해 달라”고 호소했다.

전두환(全斗煥) 정권은 미국 등 국제 사회의 압력으로 82년 12월 김 대통령을 석방했으며 그는 미국 망명 길에 올랐다. 85년 귀국했고 2.12 총선에서의 신민당 돌풍, 87년 6월 항쟁으로 대통령 직선을 이뤄냈다.

김 대통령은 87년 대선에서 김영삼(金泳三) 전 대통령과 후보단일화에 실패, 정권교체를 이루지 못했다. 이후 평화민주당 창당, 92년 대선 실패, 정계은퇴, 아태재단 창설, 국민회의 창당을 통한 정계복귀, 97년 대선 승리로 이어졌다. 87년의 야권 분열과 뒤이은 정치 활동은 민주주의ㆍ인권 운동가의 이미지를 희석시키고 정치인의 이미지를 굳혔다.

일각에서는 “김 대통령의 노벨상 수상은 때 늦은 감이 있는데 그것은 정치적 활동이 강했던 87년 이후 때문이었다”고 분석하기도 한다.

김 대통령에 대한 과거 독재정권의 탄압은 민주주의와 인권을 억압하기 위한 방향에서만 가해진 것은 아니었다. 71년 대선 때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과 `3단계 통일론'을 제시한 것은 유신정권에게는 `죄'였다.

반공이 국시인 상황에서 평화와 화해는 진보와 좌파로 매도됐고, 그에게는 `김대중은 빨갱이'라는 분칠이 가해졌다. 어찌보면 세계의 보편적 가치인 민주주의와 인권보다는 냉전구조 하에서 남북화해론을 지켜내기가 더 어려웠다. 김 대통령이 비판을 감수하며 `3단계 통일론'을 일관되게 주창, 30년이 지난 2000년에서야 남북화해의 단초를 열었다는 점은 평화와 화해를 지향하는 노벨평화상 수상의 우선적인 조건으로 평할 수 있다.

남북 화해가 긴장 완화라는 세력간 평화만을 추구하는 게 아니라 1,000만 이산가족의 한을 풀고 7,000만 민족의 생존을 보장하는 인도적 측면을 더 많이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 대통령의 노벨상 수상은 인권과 민주주의, 남북 화해라는 가치를 확산시키고 보편화할 것이다. 남북정상회담과 노벨상 수상이라는 일대 사건은 우리 사회의 수준은 물론 국제사회에서 한국에 대한 인식을 한 단계 높이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이영성기자 leey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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