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초등학교를 다니던 딸이 가장 자주 쓰던 말 중의 하나는 “That's not fair(이건 공정하지 않아)”였다. 그런데 우리 초등학교로 전학한 지 몇 달 후부터는 이것이 “선생님이 이렇게 말하셨어”로 바뀌었다. 그냥 흘러버릴 수도 있었던 사소한 관찰이 몇 년이 지난 지금에도 다시 떠오르는 것은 내가 모국에서 받은 문화적 충격 역시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미국에서 태어나 자란 아이는 모든 것이 너무나 달라 당황했겠지만, 유학 및 교수생활 10년을 마치고 돌아온 내가 놀란 것은 어쩌면 세상이 이렇게도 안변했을까라는 느낌 때문이었다. 눈꼽만치도 나아진 것이 없는 정치판, 대물림해가며 경제를 소유하고 있는 재벌들, 툭하면 길바닥에 드러눕는 투쟁정신 등 우리 사회의 큰 모습은 예나 지금이나 큰 차이가 없다.
우리가 경제성장의 모델로 칭송받다 하루 아침에 돈꾸러 다니는 신세로 전락했을 때는 어느 한 두 가지만 고장났다고 말하기 힘들 것이다. 진정한 부자가 되기 위해서는 재산을 불리는 일 못지않게 이것을 지키는 방법도 고민해야한다. 나라의 입장에서 지속적인 부의 축적이 쉽지 않은 이유 중의 하나는 분배의 문제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성장의 과실을 ~m 누는 일이 형평하지 않으면 그만큼 사회갈등의 소지가 커지게 된다. 이럴수록 단기적인 정치논리에 편승해 장기적인 성장잠재력을 해치는 정책수단이 채택되기 쉽다.
형평하지 않은 사회의 또 다른 문제점은 사회권력을 독점하는 세력의 비효율과 부패를 견제할 장치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경제위기의 원인으로 정부나 재벌의 비효율을 말하지만 그 내면에는 부의 축적수단과 이와 관련된 정책결정을 소수가 독점한다는 불공평성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한마디로 형평하지 않은 사회는 효율적이기 힘들다는 얘기다. 그런데도 우리는 성장 하나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는 한 목소리만 듣고 살았다. 여기에는 고도성장으로 절대소득이 증가하면서 분배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덜 했다는 측면도 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는 다른 목소리를 허용하지 않는 권위주의적 정권의 역할이 컸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우리사회가 공평했다기보다는, 형평성의 추구가 잘사는 나라가 되는데 별 역할을 못한다는 주입식 여론교육 탓이 컸다는 것이다.
의약분업 등 최근의 사회갈등을 우려하는 목소리 중에는 일사불란하게 고속성장을 추구하던 옛날을 잊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민주화한 사회에서 다양한 이해그룹이 제 주장을 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성장이 마이너스로 곤두박질치는 경험을 한 사람들이 제 몫찾기에 예민해지는 것도 인지상정이다.
문제는 우리 사회가 이런 잠재적 갈등의 문제에 대해 지나치게 무방비 상태로 있었다는 점이다. 일이 터진 뒤에 우는 아이 떡 하나 더 주는 식으로 복지정책이 결정된다면 한편으로 자원배분의 효율성은 떨어지고 다른 한편으로 갈등의 소지는 더 ?커지는 악순환이 발생할 것이다. 의약분업은 의사와 약사 그리고 납세자 등 집단간의 이해충돌이 구조적으로 예상되는 문제이므로, 적어도 합의가 이루어질 영역이 생길 때까지 의료보험 등 다양한 개혁을 선행하는 것이 순서다. 갈등의 여지를 무시한 하향식 정책의 대표적인 실패 사례인 것이다.
최근의 사회갈등은 위기과정의 일시적인 혼란이 아니라 달라진 세상의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다. 갈등을 눌러 해결하기 보다는 아래로 부터의 합의를 도출하는 정치적 리더십과 정책능력이 아쉬운 시점이다. 한동안 선생님 말이 제일인 줄 알던 딸아이가 중학교에 가면서 변하기 시작했다. 머리를 물들이고 싶어하는 아이에게 `안 돼' 라고 소리치는 것이 옳은 일인지 고민스럽다.
전주성ㆍ이화여대 경제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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