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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옛문화를 찾아] (6) 난징 (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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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옛문화를 찾아] (6) 난징 (下)

입력
2000.10.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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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징 시내의 동쪽 즈진산을 중심으로 이뤄진 쭝산풍경구(鍾山風景區)에는 명소가 많다. 즈진산 천문대ㆍ산정공원ㆍ하향응묘ㆍ명효능ㆍ쭝산식물원ㆍ쭝산릉ㆍ쑨쭝산기념관ㆍ영곡탑ㆍ메이링궁 등이 그것이다.신해혁명(1911)의 성공 후 1912년에

중화민국을 세운 쭝산(中山) 쑨원(孫文, 1866~1925)의 시신을 안치한 쭝산릉도 여기에 있다. 쑨원은 미국 유학 후부터 흥중회(興中會)를 조직하고, `혁명 없이 근대화는 없다'고 외치며 민주ㆍ민생ㆍ민권의 삼민주의를 내세웠다. 그는 건국 후에도 끊임없이 시련을 겪다가 1925년 3월 베이징에서 간암으로 죽었다. 그뒤 중국의 수많은 공원, 거리, 건물, 현 등에는 쭝산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그는 현대중국의 위대한 혁명가이며 국부(國父)다.

그의 시신은 4년 동안 베이징에 있다가 1929년 6월 이곳 난징의 쭝산릉에 안치~m 었다. 3년 동안 능묘 공사를 했기 때문이다. 황제의 능만큼 규모가 컸다. 해발 158m 높이에 묘실이 있기 때문에 능묘 입구부터 392개의 계단을 올라가야 한다. 왜 하필 392개였을까. 쭝산이 죽었을 때의 중국 인구가 3억 9,200만 명이었기 때문이란다. 위화타이기념비의 높이가 42.3m인 것이 1949년 4월 23일에 난징이 해방(국민군이 쫓겨가고 인민해방군이 들어옴)된 것을 기념하기 위한 것처럼.

능묘의 면적은 8만여㎡이고 전체적인 구조는 종 모양이다. 아직 깨지 못한 인민들에게 경종을 울리자는 뜻이다. 그는 죽을 때 `혁명은 아직 성공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들어가면 광장이 있고 옆에는 동상이 있다. 돌계단을 올라가면 묘도(墓道, 480m)와 정문이 있다. 문 위에는 쑨원이 쓴 글씨 `천하위공'(天下爲公 : `세상은 모두를 위한 것'이라는 뜻)

이 새겨져 있다. 정문 뒤에는 높이가 9m나 되는 비가 모셔진 비정이 있다. 비정 뒤 제당(祭堂)에는 석각좌상(5m)이 있는데, 그 뒤에는 묘실이 있고 그 가운데 대리석 와상이 있다. 쑨원은 석각좌상의 받침대 아래 깊이 안장되어 있다.

장엄하면서도 간략하고 소박한 능을 참배하고 내려와 메이링궁(美齡宮)을 찾아갔다. 메이링궁은 쑹칭링의 동생이자 쟝졔스 총통의 부인이었던 쑹메이링(宋美齡, 104세)이 살던 집(장졔스 총통 사저)이었다. 난징메이링궁이라고도 한다.

겉모습은 중국식이지만 내부는 서양식으로 지은 3층집이다. 1931년에 지었다. 쟝졔스의 국민당 정부가 난징에 있던 시절이다. 그때의 이름은 국민정부 주석 관저로 비싼 건물이었다. 1991년 중국 근대 우수건축으로 지정되기도 하였다.

내부는 쑹메이링 침실ㆍ장졔스 도서실ㆍ연회실ㆍ회의실ㆍ식당ㆍ예배실 등으로 나눠져 있는데 방마다 가재도구와 사진ㆍ도표ㆍ유물 등이 사람이 살고 있는 집처럼 잘 보존되어 있다.

쭝산링을 참관하는 사람만큼은 많지 않지만 상당히 많은 관광객이 찾아오는 메이?링궁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고 있다. 쑹아이링ㆍ칭링ㆍ메이링 세 자매의 우애와 운명, 쑨원ㆍ장졔스ㆍ마오쩌둥 세 혁명가의 협력과 배신, 인민의 이름으로 벌어졌던 중국현대사를 점철한 권력투쟁, 부귀영화의 무상함 등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오늘의 중국정부의 눈으로 보면 아니꼬울 이런 건물도 문화유산으로 잘 유지관리하고 있는 큰마음이 부러웠다. 난징시내에 있는 총통부(總統府)를 찾아갔다. 챵지앙로에 있는 총통부는 전국중점물보호단위로 지정된 문화유산인데 양강 총독서(청)ㆍ천조궁전(태평천국)ㆍ쑨쭝산 임시 대총통부(중화민국 임시정부)ㆍ국민정부 총통부(1927~1949) 등으로 사용되었다. 정권의 주인공이 바뀐 것을 다 따지면 40번에 가깝다. 그만큼 권력의 무상함을 말해주는 명소이기도 하다.

총통부는 건물과 정원으로 구분되고, 앞쪽의 건물들은 청 때부터 있던 전통건축들과 20세기에 지은 양식 건축들로 이뤄졌다. 이곳에 전시된 ?유물은 1912년 1월부터 1949년 4월까지의 것들인데, 중국인이 `세기의 위인'으로 숭앙하는 쑨쭝산 관련유물과 총통부 문물 사료 등으로 구분하였다.

매점에서 책을 사면 기념 도장을 찍어주는데 내용이 `쑨쭝산 임시 대총통 판공실 유적지 참관 기념'으로 되어있는 게 흥미롭다. 쑨쭝산은 1912년 1월부터 4월까지 3개월만 머물렀고, 장졔스는 1927년 4월부터 22년간 머물렀는데도 그의 이름은 쓰지를 않았다.

이 총통부에는 따로 진열실이나 박물관은 없다. 사무실ㆍ회의실ㆍ접견실ㆍ침실 등 자체가 바로 진열실이고 놓여져 있는 가구와 벽에 건 수많은 사진들이 바로 유물들인 것이다. 거기엔 치욕스러운 사진도 있다. 1937년 12월부터 8년간 일본군이 난징을 점령하고 가짜 유신정부를 내세웠을 때의 사진들이다. 후손들에게 치욕의 역사도 역사이기 때문에 보여주고 가르치는 것이다.

`국민정부'라고 크게 새겨져 있는 정문 위에 일장기를 올리고 만세를 부르는 일본군의 x? 습, 유신정부의 깃발을 올리고 경축행사를 벌이는 모습 등이다. 그리고 장졔스가 1949년 1월 21일까지 살던 총통 관저(2층 양옥)도 가구 등과 함께 잘 보존하고 있다. 정권의 무상함과 난징 사람들의 고통 등을 여실히 보여주는 이 총통부로 국내외 관광객이 끊임없이 몰려들고 있었다.

허영환교수 답사기

성신여대 교수, 문화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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