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울림 '불꽃의 여자, 나혜석'"이제 우리 여성도 새로운 운명을 개척하기 위해 나설 때입니다. `움직이는 자여, 실패 있음을 각오하라' 하였습니다.”
나혜석의 목소리가 카랑카랑하다. 이어지는 말은 선언적이기까지 하다. “미끄러져 머리가 터지는 한이 있더라도, 한 걸음도 밟지 못하고 나자빠지더라도, 난 이 봉건의 두터운 벽에 맞서 보려구 합니다.”
소극장 산울림에 페미니즘 선언이 당당히 울려 퍼진다. `위기의 여자', `담배 피우는 여자' 등 페미니즘 연극의 산실로 자부해 온 소극장 산울림이 이제 무대를 조선으로 옮겨, 한국적 페미니즘의 연원을 파고 든다. 극단 산울림의 `불꽃의 여자, 나혜석'. 유진월 작, 채윤일 연출.
삶이 곧 격랑이었던 여자였다. 1921년 장안의 화제였던 첫 개인전, 변호사 김우영과 가졌던 결혼과 서구 여행, 31년 이혼 후 급격한 피폐 등 삶 자체가 소설같았던 여자였다. 2월 문화관광부에서 이달의 문화인물로 선정, 새삼 부각된 인물이다. 그러나 유작전 등 추모 행사만으로는 시대를 앞서 간 비극적 페미니스트의 내면은 복원될 수 없었다.
연극은 48년 서울시립병원 무연고자 병동에서 숨을 거두기까지를 서사적으로 보여준다. 나혜석의 분신이나 의식 세계를 보여주는 코러스(여자 셋,? 남자 하나), 그의 처권(妻權) 침해 소송 기사 등은 그의 삶을 객관적으로 승화시키는 장치들이 그것들이다.
타이틀 롤의 박호영(31)이 관심의 초점이다. 1995년 이래 러시아의 모스크바 국립대학 등 3개 대학에서 연기 수업을 마치고 온 실력파다. 특히 러시아어로 펼쳤던 장 콕토의 모노 드라마 `목소리'는 현지의 호평이 쏠렸다.
12월 박사학위 논문을 제출하기 위해 러시아로 들어 가는 박씨는 “학위 논문 주제가 바로 `연기자로서 바라 본 나혜석” 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념의 투사라기 보다는 예술가로서 갖는 감성의 흔들림을 보여주고 싶다”고 다짐한다. 그가 남자들과 벌이는 연기 대결이 볼 만하다.
남편 김우영은 변호사와 외교관, 총독부 관리 등을 거친 출세의 화신이다. 혜석에게 반해 결혼하지만, 그녀의 분방함에 못 이겨 헤어지고 만다. 광대에서 악인까지 능란히 소화해 내는 안석환이 연기한다. 또 하나의 남자 최린이 있다. 왜 나혜석은 그 간 쌓아 올린 명성을, 이 남자를 만나 일거에 허물고 마는가. 국립극단 출신으로 선이 굵은 전국환이 3ㆍ1 운동 당시 민족대표였던 최린으로 분한다. 17일부터 소극장 산울림. 화ㆍ목 오후 7시, 수ㆍ금ㆍ토 오후 3시 7시, 일 오후 3시. (02)334-5915
장병욱기자 aj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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