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실크로드를 답사한 것은 이번으로 다섯 번째가 된다. 1990년 첫 답사를 시작한 뒤 2년에 한번 꼴로 다녀온 셈이다. 한 두 번 다녀오고 나면 시들해질만도 하건만 실크로드는 갈 때마다 새롭다.몇 시간을 달려도 끝을 볼 수 없는 초원 너머로 펼쳐진 지평선, 굽이쳐 흐르는 강가나 나즈막한 산허리에 흩어져 풀을 뜯는 말과 양떼, 지글거리는 햇빛을 받아 반짝이며 일렁거리는 사막의 능선들, 조금이라도 물이 있으면 빼곡하게 자라나 푸른 잎을 뽐내는 나무들. 아마 이런 것들이 주는 강한 인상 때문일 것이다.
실크로드는 흔히 역사적으로 동서양을 이어준 간선도로라고 불리운다. 원래 실크로드라는 말은 1877년 독일의 지리학자인 리히트호펜이 창안한 것(die Seidenstrasse)으로 처음에는 학자들 사이에서만 제한적으로 사용되다가, 점차 보편화하면서 각국에서 자기네 말로 옮겨 부르게 된 것이다. 영미권의 `실크로드' 중국의 `사주지로(絲綢之路)' 터어키의 `이펙 욜루(Ipek Yolu)'가 그러하고, 우리나라에서는 '비단길'이라고도 부른다.
이러한 길이 언제부터 존재했는가를 말하기는 어렵다. 선사시대의 유적들의 분포는 이미 문헌기록이 있기 오래 전부터 동서간의 교류가 있었음을 증명하고 있다. 그러나 학자들은 지금부터 2천여년 전 한(漢) 무제의 밀명을 받고 장안을 출발해 아프가니스탄까지 다녀온 장건(張騫)을 실크로드의 `개척자'라고 부른다.
물론 그 이전에 아무도 이 길을 간 적이 없었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그가 중앙아시아의 미지의 세계에 대해 처음으로 상세한 보고를 남겼고 이것이 중국인의 세계관을 확대시키는 데에 큰 기여를 했다는 점에서 그에게 붙여진 칭호가 부적절한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그 뒤 중국에서 파견된 군대는 파미르 고원이나 중앙아시아의 오아시스를 누볐고, 사신들의 발길도 멀리 지중해에까지 미쳤다. 물론 동쪽에서만 간 것은 아니었다. 서구나 중동의 사신과 상인들도 실크로드를 이용하여 인도로, 몽골로, 중국으로 왔다. 베니스 출신의 마르코 폴로는 무려 26년에 걸친 해외여행의 결과를 `동방견문록'이라는 책으로 남겼고, 이것은 서구인들의 지리지식을 엄청나게 변화시키고 말았다. 콜럼버스가 1492년 산타마리아호를 타고 출항할 때 그의 품 속에는 꼼꼼히 메모가 적힌 `동방견문록'초판본이 있었다고 한다. 이렇게 볼 때 실크로드를 통한 동서교류가 대항해의 시대를 잉태시켰다고도 할 수 있다.
결국 실크로드를 통한 동서간의 교통과 교류는 문명 간의 장벽을 허무는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다. 그리고 그 개념은 시대가 내려오면서 확대되어 갔다. 처음에는 중국의 서부 지역과 오리엔트 지방을 연결하는 건조지대의 교통로를 지칭했지만, 오늘날은 북방의 초원을 가로지르는 길과 남방의 인도양을 4?횡단하는 길까지 모두 포괄하는 경우도 많다. 그래서 이를 각각 `사막로' `초원로' `해양로'라는 이름으로 부르기도 한다.
실크로드의 노선만 다양해진 것이 아니었다. 그 길이도 늘어나 동서 양쪽의 기점과 종점도 자꾸만 먼 곳으로 설정되었다. 동쪽 끝이 당나라 수도였던 장안(현재 산시성 시안)에서 한반도로, 심지어 일본으로까지 밀려났다. 서쪽도 마찬가지여서 바그다드나 안티오크가 콘스탄티노플(터키의 이스탄불)로, 다시 로마에까지 이르렀다.
실크로드 개념의 확장은 결코 기이한 일이 아니다. 지리적인 지식이 확대되고 새로운 교통로가 알려지면서 루트가 다양해지는 것은 당연한 이치였고, 교류의 폭이 확대되고 보다 먼 곳과의 접촉이 가능해지면서 기점과 종점이 연장되는 것 역시 피할 수 없는 결과였다.
따라서 이제는 실크로드를 중국의 장안과 서구의 로마를 잇는 교통로라고 단순히 말하기 힘들게 되었다. 실크로드는 근대 이전 유라시아 대륙을 횡단하는 거의 모든 교통로를 총칭하는 엄청나게 광범위한 개념이 되어 버렸다.
이처럼 실크로드는 `유라시아'라는 몸통을 구성하는 여러 지체들, 즉 남과 북 그리고 동과 서의 다양한 문명들이 유기적으로 연관되어 움직일 수 있도록 해 준 혈관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실크로드를 `혈관'이나 `간선도로'라고 부르는 것은 자칫 역사적 현실을 호도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서울에서 고속도로를 이용하여 부산까지 간다고 상정할 때, 그 중간에 있는 지점들은 우리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는 곳이다. 그저 빨리 지나쳐야 할 곳일 뿐이다. 실크로드라는 것이 과연 그러했을까. 물론 그렇지 않았다. 실크로드촛m 서의 교통과 교역을 담당했던 장본인은 다름아닌 중앙아시아의 주민, 상인들이었고 각 지역의 문물은 이 지역을 거치면서 또 그 주민들의 손에 의해 변용되어 전달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제 `길' 혹은 `선(線)'으로서의 실크로드 개념에 대해 회의를 품지 않을 수 없다. 실크로드는 단순히 중국이나 서구의 문화가 상대편에게 옮겨질 때 사용된 도로가 아니었다. 그것은 상이한 문화들이 도입되어 머물면서 변화되고 다시 다른 지역으로 전달되는 `장(場)'이자 `면(面)'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장'은 바로 초원과 사막을 무대로 하는 `중앙유라시아(Central Eurasia)'였다. 이제 실크로드는 새로운 개념으로 다시 태어나야 할 때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동양과 서양'의 가교가 아니라 `유라시아'의 가교였고, 역사적으로 그 역할을 수행했던 중앙유라시아의 세계야말로 실크로드의 모태였기 때문이다.
실크로드에 대한 이러한 신개념의 수립은 우리와도 결코 무관하지 않다. 최근 경의선.경원선 철도의 복원은 한반도에서 시작되는 소위 `철(鐵)의 실크로드'에 대한 기대를 부풀리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21세기 새로운 실크로드의 진정한 주인이 되기 위해서는 그것을 단순히 `교통로'정도로만 이해하는 수준에서 과감히 탈피하여, 먼저 중국 몽골 중앙아시아 시베리아 등지를 문화적 경제적 진출의 발판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과거의 역사는 중앙유라시아, 즉 `면'으로서의 실크로드를 장악하는 쪽이 결국 `선'으로서의 실크로드의 승자가 되었음을 말해준다.
김호동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
■골인들의 동물적 지리감각
그 옛날 실크로드를 이용했던 사람들은 어떻게 길을 찾았을까. 표지판도 없고, 길도 분명치 않은 상태에서 의존할 수 있는 것은 천부적인 방향감각과 밝은 길눈 뿐이었으리라. 지금도 몽골인들을 보면 과거 유목민들이 지닌 뛰어난 길 눈과 지리감각을 짐작할 수 있다.
7월 10일 역사에세이 기행팀은 몽골 수도 울란바토르 동쪽의 톤육쿡비를 찾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흙길 조차 없는 초원이어서 도대체 어디가 어딘지 알 수 없었다. 일행을 태운 러시아제 푸르동차의 운전사 누르지트(30)도 톤육쿡비는 처음.
그 역시 당황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때 주민 세 명을 발견한 누르지트가 길을 묻더니 속도를 높이기 시작했다. 통역이 전해주는 내용은 “초원의 색깔이 옅게 변하는 곳으로 가면 흰 집이 있다”는 것이 전부였다. 그 흰 집은 40km나 떨어져있었다. 기행팀이 보기엔 꼭 같은 초원의 연속이라서 “정말 여기로 가면 되느냐”고 거듭 물었다.
그러나 누르지트는 기행팀이 전혀 발견하지 못한 목표를 이미 발견하고 그 쪽으로 차를 몰고 있었다. 30여분이나 달린 끝에 나타난 흰 집은 불과 3m정도 높이의 1층 집. 기가 막혔다. 이어 이동가옥인 게르를 지나 톤육쿡비를 찾을 수 있었다.
톤육쿡비를 함께 찾아간 몽골과학아카데미 유학생 김장구(金壯求·33)씨는 “몽골 사람들은 대개 초원 구릉의 색깔과 경사도, 어쩌다 보이는 암석 색깔의 차이 등을 통해 길을 찾는다”며 그들의 지리감각을 `동물적'이라고 표현했다. 가도가도 초원뿐인 환경 속에서 살아남으려는 본능이라는 것이다.
이의 바탕은 물론 좋은 시력이다. 평균 시력이 3.0은 될 것이라고 사람들은 말한다. 사방이 트여 있으니 눈이 나빠질 요인이 거의 없단다. 울란바토Xm 시내에도 안경점이 있지만 고객의 90% 이상은 선글라스 구입자다.
하지만 요즘 몽골 젊은이들은 길눈이나 지리감각이 떨어진다고 한다. 차를 타고 잘 닦여진 길을 다니는 그들에게 유목민과 같은 지리감각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박광희기자 kwpar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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