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0월 파키스탄에서 육군 참모총장인 페르베즈 무샤라프 장군이 주도하는 쿠데타가 발생했을 당시 미국은 모든 외교 채널을 동원해 무샤라프 장군과 접촉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미국은 핵무기 보유국인 파키스탄이 정정불안의 돌파구로 핵무기 보유국인 인도와 전쟁을 할 수도 있다는 최악의 시나리오까지 생각해야만 했다.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파키스탄의 상황은 쉽게 해결됐다. 정상적인 외교채널에 무반응을 보였던 무샤라프 장군이 평소 친분이 있던 미국 중부사령관인 앤서니 지니 대장에 전화를 걸어 쿠데타의 배경을 설명하고 이해를 구해왔기 때문이다.미국은 세계를 4개의 광역지역으로 나눠 관할하는 군 사령부를 운용하고 있다. 이른바 `지역 사령관'(regional commanders-in-chief :CINCs) 제도로 아시아와 태평양, 중동과 서남아, 유럽, 남미 등을 관할하는 사령부를 두고 현역 대장들이 부대를 지휘한다.
이들의 주임무는 돌발적인 국지전에 대비하는 것이지만 또 하나 보이지 않는 중요한 역할은 관할 국가들을 수시로 방문해 국가원수를 비롯해 고위관료, 정치인, 경제인, 군장성 등~? 만나 교류하는 것이다. 유니폼만 입었지 하는 일은 외교관들과 마찬가지다. 외교관들이 해결 하지 못하는 현안들을 타결할 수 있는 `장성외교'라는 또 다른 통로를 구축해 놓은 것이다. 미국의 강력한 외교력은 이 같은 저력에서 나온다고 말할 수 있다.
최근 국내외 정세를 볼 때 상대방과 전투만 하는 것이 군인의 모든 것은 아닌 듯 싶다. 지난 9월에는 김일철 인민무력부장(인민군 차수) 등 북한 군사대표단이 사상 처음으로 남한땅 제주도에서 조성태 국방장관 등 우리측 대표단과 회담했다.
휴전전을 마주보고 서로 대치하던 양측의 군 수뇌부가 외교관처럼 협상한 것이다.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오른 팔인 조명록 군 총정치국장 겸 국방위원회 제 1부위원장(인민군 차수)도 특사로 워싱턴을 방문해 빌 클린턴 대통령과 매들린 올브라이트 국무장관, 윌리엄 코언 국방장관 등을 만난다. 가슴에 각종 훈장을 달고 어깨에는 커다란 왕별을 번쩍이며 인민군 장성들이 외교전을 펼치고 있는 것이다. 조 부위원장의 방미 성과를 아직 평가하기는 이르지만 일단 북한이 그토록 원하던 미국과의 직접 대화라는 물꼬를 `군인'이 뚫었다는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군도 필요하면 언제든지 외교협상에 나설 수 있으며 이는 바로 국력의 총체적 결집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북한이 군 수뇌부를 내세운 것도 이 같은 이유일 것이다.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은 주변 4강이 보장할 때 더욱 무게가 실린다. 우리는 그동안 미국에 대한 외교와 군사협력을 주로 해왔지만 북미, 북일 관계가 빠르게 진전되고 있는 만큼 중국과 일본, 러시아 등과도 외교는 물론 군사협력도 강화해야 할 것이다. 우리군 장성들은 대부분 야전군 출신?들로 전투에는 강하지만 미국 이외의 외국 사정에는 별로 밝지 않다. 각국에 영관 장교급 무관들을 파견하지만 이들 중 별을 달고 군 고위층까지 승진하는 장군들은 별로 없다.우리도 각국 사정에 정통하고 외교 능력까지 갖춘 장성들을 많이 보유해야 할 때가 왔다.
이장훈 국제부 차장 truth21@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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