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처음 평양에 간 것은 1992년 2월 제6차 남북고위급회담을 취재하기 위해서였다.8살때 6.25전쟁을 겪고 분단의 비극속에 살아온 나에게 북한 방문은 만감이 교차하는 여행이었다.
판문점에서 개성까지 버스로 30분, 개성에서 평양까지 기차로 3시간 20분을 달리는 동안 봄눈이 흩날리는 차창밖으로 북한땅을 바라보던 감회가 아직 생생하다.
지난 8월 언론사사장 방북단의 일원으로 8년만에 북한을 여행하면서 나는 남북관계의 변화를 실감할 수 있었다.
가장 큰 변화는 남한사람들과 북한사람들이 서로의 눈을 보면서 마음놓고 웃을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경계심이나 저항감없이 서로의 손을 잡을때 한민족이라는 따뜻한 감정이 밀려왔다.
8년전 남북고위급 회담장에는 봄바람이 불고 있었지만 회담장을 나서면 냉전의 장벽이 높았다.
거리에서 손을 흔드는 평양 시민들은 무표정하고 기계적이었다.
그들을 향해 마주 손을 흔드는 우리일행도 마찬가지였다.
남북한 사람들은 공포나 긴장없이 서로를 대할 수 없었다.
회담장이나 연회장에서 어쩌다 남측일행과 멀리 떨어져 있게 되면 순간적으로 식은땀이 흐를만큼 무서웠다.
납치당할 수도 있다는 공포가 내 마음속에 도사리고 있었다.
2000년 6월 남북의 정상이 순안공항에서 손을 맞잡았을 때 남북 모두가 울었다.
동족상잔의 피에 젖었던 산천도 울었다.
그 눈물로 우리는 증오를 씻고, 공포를 씻었다.
그리고 화해의 희망, 공존공영의 희망을 보았다.
"50년동안 서로 싸웠으니 바보짓을 한거지요"라고 남한 언론사 사장이 말했다.
7박8일의 일정으로 우리는 가는 곳마다 듣게되는 '수령님' '장군님' 칭송에 좀 지쳤다.
그래서 한 유적지에서 북한 안내인의 설명이 끝나자 우리 일행중 한 사람이 "여기선 장군님이 그렇게 다 해주시니 남한에도 장군님이 한 사람 있어야 겠어"라고 농담을 했다.
그러자 그 여자 안내인은 잽싸게 "통일되면 우리 장군님 같이 모시자요"라고 맞받았고 남북이 함께 웃음을 터뜨렸다.
과거같으면 시비가 일어날 수도 있는 대목이었다.
8년만에 다시간 북한,평양과 백두산과 묘향산을 둘러보면서 나는 '변화'를 만끽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공존공영의 길이 얼마나 멀고 어려울 것인지도 예측할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가는 곳마다 보게되는 북한의 슬로건 "가는 길 험난해도 웃으며 가자"를 "가는 길 험난해도 참으면서 가자"로 고쳐보았다.
/장명수 한국일보사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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