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에는 한글날이 공휴일이었는데 그것이 폐지되어 유감스럽다. 대체 국경일이라고 하루를 쉰다는 것은 아침에 느긋하게 늦잠자고 다른 집에 태극기들이 걸린 것을 보고 우리 대문에도 국기를 내다 달면서 잠시나마 오늘이 무슨 날이던가를 기억하는 정도만 해도 상당한 의미는 있는 것이다.또는 그것만으로 좀 부족한 것 같다면 늦은 아침을 먹고 훈민정음 서문을 한번쯤 찾아 읽어보는 것도 좋은 일이었다. 볼 때마다 놀라운 감흥을 일으키는 이 책은 1446년에 발간된 이래 그 존재가 알려지지 않았으나 오백년 후인 1940년에 안동의 어느 고가에서 발견되어 고 간송 전형필의 소장이 되었다.
간송이 이를 가져온 고서상에게 값을 묻고는 그보다 몇 배의 돈을 주면서 `이 책은 그렇게 싼 책이 아닐세' 라고 했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국보 70호로 지정되었으며 유네스코의 세계유산으로 등록됐다. 내 책은 그보다는 못하지만 민중서관에서 60년에 나온 것이다. 내용은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서문과 예의편은 세종대왕이 직접 쓴 것으로 본문에 해당하고 이를 해설한 해례편은 정인지가 썼다. 만만치 않았던 반대 상소에도 불구하고 그 반포의 과정을 눈여겨 보면 대왕의 민족주의적 동기가 무엇보다도 돋보인다.
어문 뿐 아니라 민족의 명운이 중국에 속국화 되었던 시절에 우리 글을 만들고 백성을 가르쳐야겠다고 결심한 것은 한나라의 군왕으로서 감탄할 일이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대왕의 문구는 제자해(制字解)에 쓰인 `사람의 소리도 다 음양의 이치가 있는 것인데 사람이 살피지 못한 것 뿐이다(人之聲音, 皆有陰陽之理, 願人不察耳)'라는 말이다.
내가 설계를 할 때에도 어느 경우에나 그 땅에 잘 맞는 좋은 건물이 서려면 어디엔가 공식과 정답이 쓰여 있을 것이고 건축가란 그것을 얼마나 가깝게 찾아낼 수 있느냐 하는 노력을 경주할 뿐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이제 정음을 만듦도 애초부터 슬기로 마련하고 노력하여 찾은 것이 아니라 다만 그 성음을 바탕으로, 그 이치를 다한 것뿐이다(初非之營而力索, 但 因其聲音而極其理而己)'라 하였으니 대왕 자신의 발명이기보다 하늘의 이치를 따른 것 뿐이라고 겸손하게 말한 대목이 놀랍다.
이어서 `이치가 이미 둘이 아니니 어찌 천지귀신과 함께 그 쓰임을 같이 하지 않겠는가(理致不二, 則何得不與天地?? 神, 同其用也)'라고 썼다. 원리는 하나 뿐이다. 하늘이나 인간이나 그 쓰임새의 좋고 나쁜 원리는 하나다 라는 용(用)의 철학도 존경스럽다. 이것은 요샛말로 `기능'에 관한 탁월한 해명이다.
또 정인지는 해례편에 쓰기를 `이것은 자못 하늘이 성인의 마음을 열어 손을 빌었을 뿐이로구나(是殆天啓, 聖心而 假手焉者乎)'라하고 이어서 `하늘의 주심이니 어찌 지혜와 재주로 될 것이랴(天授何曾智巧爲)'했으니 이 역시 하늘의 정해진 이치를 찾아내어 그대로 원용한 것이라는 기본철학의 표현이라고 보겠다. 건축가는 건축에서 자신의 재주를 뽐내지 않아야 한다는 가르침이기도 하다.
종결부분은 `자헌대부 예조판서 집현전 대제학 신 정인지는 두 손 모아 머리 숙이고 삼가 씀'으로 끝난다. 그 앞에서 함께 일한 최항, 박팽년, 신숙주, 성삼문, 강희안, 이개, 이선로 등 집현전 학사들의 이름을 함께 모두 밝혔으니 훌륭한 임금과 현명한 신하들의 이런 만남(集賢)은 가히 군신관계에 있어 이상형이라 할만하다.
세종대왕은 스스로 집현전이라는 왕립연구소의 소장을 겸했던 것이며 이 소장과 연구원 관계는 정말로 멋진 관계들이었다. 성삼문, 박팽년, 이개 등은 후일 대왕의 유지대로 단종을 지키다가 세조에게 죽음을 당한 사육신의 일원으로 그 충성과 절개 또한 놀라운 사람들이었으니 한 시대를 최고의 중흥기로 만들고 한 민족의 역사를 바꾸어 놓고 인류 문화사에 영원히 남을 `작품'을 만든 인물들의 행적은 높은 학문과 곧은 지조가 둘이 아님을 보여주는 것이어서 머리가 숙여질 뿐이다.
김원
건축가 ·광장건축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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