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경제난 타개의 돌파구로 `개혁 정공법'을 택했다. 적어도 겉으로는 그렇게 보인다.사실 정부의 경제운용기조는 진 념 경제팀 출범을 계기로 변화보다는 안정, 새로운 개혁착수 보다는 기존개혁의 마무리에 초점이 맞춰져 온 것이 사실.
이는 개혁 피로현상이 노골화하는 사회 분위기와 맞물려 자연히 '개혁의 후퇴'로 비춰질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유가폭등, 반도체가격 하락, 대우차 매각결렬 등 잇딴 악재의 돌출속에 국내 금융시장이 `집단적 공황'양상까지 보이고, 관료들에 대한 불신과 제2의 경제위기에 대한 우려감이 높아지게 되면서 정부는 불가피하게 `개혁'쪽으로 방향을 선회할 수 밖에 없었다.
김대중 대통령의 언급이나, 진 념 경제팀이 제시한 정책만 보면 `개혁드라이브'의 의지는 국제통화기금(IMF) 체제 초기를 방불케 한다.
'초심으로 돌아가자'는 슬로건속에 부문별 개혁과제 진행상황에 대한 월별 점검 시스템이 가동됐다. 대통령이 직접 주재하는 경제대책회의가 많아졌고, 내년 2월말을 시한으로 한 부문별 스케줄도 확정 공표됐다.
개혁의 초점도 과거 1차 구조조정때처럼 금융과 기업 부문에 맞춰져 있다. 금융과 기업의 부실 뇌관을 제거하지 못한다면, 금융시장 안정과 대외신인도 회복은 불가능하고, 경제 안정도 기대할 수 없다는 판단에서다.
'데드라인'이 내년 2월로 정해진 공공·노동개혁과는 달리 금융·기업개혁은 두달 앞당겨 금년말까지 종결짓기로 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된다.
금융개혁은 10월중 '은행경영평가완료→11월 부실은행 공적자금 투입→12월 보험 리스 증권 등 제2금융권 구조개혁 종결'로 이어지는 시간표가 제시됐다.
정부가 이 같은 빡빡한 일정을 국민들에게 제시한 데에는 공적자금 추가조성 및 금융지주회사법안 처리를 외면하고 있는 정치권에 대한 압박 의미도 담고 있다.
기업구조개혁은 1차 구조조정에서 '용두사미'로 끝난 부실기업 정리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금융감독원의 '살생부'작성 작업은 이미 시작됐고, 부실기업주에 대한 정부와 채권단의 양동 압박체제도 이달중엔 전면 가동된다.
연말까지는 워크아웃기업, 법정관리기업, 겉은 멀쩡하지만 속은 썩어있는 대기업등에 대한 정리를 완결짓는다는 계획이다.
문제는 정부의 실천의지와 저항 돌파력이다. `개혁에 중단은 없다'는 얘기를 국민들은 귀가 따가울 정도로 들어왔고, 이젠 대통령의 웬만한 말 한마디에도 충격과 긴장이 무뎌진 상태다.
따라서 아무리 경제팀이 6개월 개혁과제를 월별로 쪼개 스케줄을 제시하고, `12대 과제'란 이름으로 포장을 하더라도, 그것만으론 국민들에 `개혁초심'을 호소할 수 없는 상황이다.
한 민간경제연구소장은 “백마디 말보다 한가지 실천이 더 중요한 상황”이라며 “과연 정부가 얼마나 부실기업들을 과감하게 정리할 수 있을지, 또 금융구조조정을 얼마나 밀어붙일 수 있을지 두고 볼 일”이라고 말했다.
국민적 긴장감은 이미 IMF체제를 잊은지 오래고, 정권 임기가 후반부로 치달으면서 정치권과 관료들의 눈치보기는 갈수록 심해지고 있는 상황. 따라서 정부의 새 개혁드라이브는 1단계 구조개혁때 보다 훨씬 힘겨운 작업이 될 것이란게 일반적 평가다.
이성철기자
sclee@hk.co.kr
■경제장관회의 이모저모
김대중 대통령은 4일 비장한 심정의 경제난 대처의지를 밝히면서 경제관료들의 `책임론'을 제기했다.
김 대통령은 이날 낮 청와대에서 경제장관들과 도시락을 들며 `4대 부문 개혁과제 보고회의'를 주재하면서 “대우자동차와 한보철강 매각무산과 관련된 책임소재를 분명히 가리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김 대통령이 단호한 어조로 구체적 사안에 대한 책임문제를 언급하자, 회의장은 일순 긴장이 돌았다. 김 대통령은 “어처구니없다”며 “계약 후 꾸준히 밀착해서 일을 했다면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없는 만큼 경위를 조사, 책임을 지우도록 하라”고 말했다.
김 대통령이 좀처럼 특정사안, 특정인을 지목해서 질책하지 않았다는 점을 고려하면, 책임론은 작심한 문제제기로 볼 수 있다.
김 대통령은 이날 아침 진념 재경부장관 주재의 경제정책조정회의가 오후 2시에 예정돼 있는데도 “10시 국무회의 후 점심 때 직접 경제장관들을 만나야겠다”고 말해 오찬 회의를 열게 했다. 뭔가 강력한 메시지를 전해야겠다는 생각이 있었던 것이다.
그 메시지는 우선적으로 4대 부문 개혁의 완수 의지였다. 시장의 신뢰를 확보하기 위해 어떤 일이 있어도 4대 부문 개혁을 일정대로 완수하겠다는 것이다.
김 대통령 자신이 경제의 어려움을 인식하고 있다는 사실도 강조됐다. “4대 개혁은 우리 생존과 직결돼있다” “직접 매월 12개 핵심과제를 챙기겠다” “우리경제의 미래에 대한 확신을 주어야 한다”는 강한 언급들이 있었다.
이런 메시지 속에 들어있는 또 하나의 메시지가 바로 대우자동차, 한보철강 매각무산의 책임론이었다. 그동안 관료들은 뇌물이나 추문에 연루되지 않으면 책임질 일이 별로 없는 `무풍지대'에 있었다.
따라서 김 대통령은 관료사회의 보신주의를 질타하면서 정책적 과오에 대한 책임을 묻겠다는 방침을 밝혔다고 볼 수 있다.
사실 IMF도 경제관료들의 무사안일, 판단미스에 기인한 측면도 크다. 대우자동차, 한보철강의 매각 무산도 국제기업간 거래에서 흔히 일어날 수 있는 사건으로 치부될 수 있지만, 그 이면에 도사리고 있는 경제관료들의 문제점과 후유증은 예사롭게 지나쳐서는 안된다는 게 김 대통령의 인식인 것이다.
청와대의 한 고위관계자는 “대우자동차, 한보철강 매각무산으로 대외신인도가 떨어지고, 금융시장이 흔들리고, 주가도 악영향을 받고, 국제적 웃음거리가 되고, 국민 자존심도 상처입고, 불안감도 늘어나는 등 그 부작용은 결코 적지않다”고 말했다.
김 대통령은 책임대상을 구체적 적시하지는 않았지만, 그 범위는 작지는 않다. 청와대 관계자들에 따르면, 대우자동차 매각은 대우 구조조정위원회(위원장 오호근)가 맡았고 한보철강 매각은 초기에는 이를 담당했던 제일은행이 매각되면서 자산관리공사(사장 정재룡)가 맡았다.
청와대의 한 고위인사는 “금감위가 경위와 전말을 조사, 책임솔? 재를 규명할 것”이라고 말했다.
따라서 일차적으로 대우 구조조정위원회와 자산관리공사가 도마에 오를 전망이다. 그러나 이들 기관을 감독하는 상급기관인 금감위와 재경부도 자유로울 수는 없다.
이에 대해 청와대 관계자들은 “조금이라도 관련됐으면 책임을 지우겠다는 것은 아닐 것”이라며 `상징적 문책'을 전망했다.
김 대통령이 책임론을 언급한 것이 누구를 처벌하기 보다는 관료사회에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고 국민감정을 추스리는 한편 포드사 네이버스사 등 해당 기업과 국제사회에 경고를 보내기 위한 다목적 포석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영성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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