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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옛문화를 찾아] (5) 난징(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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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옛문화를 찾아] (5) 난징(上)

입력
2000.10.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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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중국 문화유산 기행을 하면서 지도와 책을 많이 샀다. 예를 들면 베이징에서는 베이징 지도와 베이징 역사서를, 시안과 난징에서도 각각 그 지역 지도와 역사서를 샀다. 박물관ㆍ미술관ㆍ유적지 등을 찾아가기 전에 그 책들을 살펴보고 읽으면서 공부를 했다.난징(南京)에서도 그랬다. 거기서 12곳을 보았는데 그 가운데 6곳을 소개하고자 한다. 시안에서 난징으로 간 비행기는 오후 11시에 난징 공항에 착륙했다. 시내 중심지까지는 70km., 공항로는 넓고 깨끗하고 밝았다. 먼지 ?많고 더러운 시안과는 아주 달랐다. 난징은 인구 200만명 이상의 중국 내 22개 대도시 가운데 제일 깨끗한 곳이다. 호텔 숙박료는 베이징 시안 등과 비슷했지만 방이 더 넓고 음식도 더 좋았다. 택시 등 교통수단도 크고 깨끗하고 좋았다.

난징의 옛이름은 건업(建業) 건강(建康) 금릉(金陵) 경사(京師) 등이라 했다. 229년부터 동오ㆍ동진ㆍ송ㆍ제ㆍ양ㆍ진ㆍ남당 등의 서울이었기 때문에 난징에는 고적과 명승이 많고, 박물관과 미술관에는 이 지방의 문화유산이 많다. 황허문화의 복판(시안)에서 창지앙(長江)문화의 복판(난징)으로 들어온 셈이다.

난징박물원 방문은 세 번째다. 난징박물원은 1933년 국립중앙박물원으로 시작할 때는 옛 궁궐건물 한 채에서 시작하였는데 60주년 되는 해인 1993년 신관 건축에 착공하여 1999년 9월에 완공ㆍ개관하였다. 구관은 정말 보잘 것이 없었다. 이것도 박물관인가 했다. 그런데 신관은 엄청나게 다른 최신식 첨단시설을 갖춘 박물원이었다.

두 번째 만난 관장은 자랑스런 표정으로 박물원을 소개했다. “소장유물 42만점(이 가운데 국보급 문물과 국가 1급 문물이 2,000 점 이상)이나 되는 우리 박물원에는 11개의 진열실(청동기ㆍ자기ㆍ서화ㆍ옥기ㆍ자수ㆍ도예ㆍ칠기ㆍ민속ㆍ현대예술ㆍ명인서화 등)과 전문요원 170여 명이 있습니다. 또 고고연구소ㆍ민족민속연구소ㆍ고대예술연구소ㆍ문물보호기술연?구소ㆍ고건축연구소 등도 있습니다. 현대화ㆍ과학화ㆍ전업화를 향하여 직원 모두가 뛰고 있지요.”

난징박물원에서 주의깊게 본 그림은 꿍시엔(?賢, 1599~1689)의 `악양루도'(岳陽樓圖)였다. 비단에 수묵으로 그린 이 그림은 조국 명의 멸망(1644) 이후 금릉파(金陵派) 화가로 이름을 떨치기 시작할 때의 작품이다. 281×240cm의 대작으로, 숙달된 기법과 중묵(重墨)의 애용, 명암의 변화 등이 그의 독창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태평천국 역사박물관도 깜짝 놀랄 정도로 달라져 있었다. 난징 시내에서 제일 아름다운 명 시대 정원인 천위엔(瞻園, 1만 6,000㎡) 안에 있는 이 박물관은 21세기를 맞으면서 중국경제가 달라진 것만큼 변했다. 1851년부터 1868년까지 홍수전(洪秀全)과 양수청(楊秀淸)에 의해 화중지방에서 일어났던 농민운동인 태평천국의 난 당시 그들이 천경(天京)이라 하여 수도로 삼은 곳이 난징이었고, 또 그들의 왕부(王府)가 천위엔에 있었기 때문에 이 박물원은 제자리를 잡고 있다고 하겠다.

태평천국 역사박물관의 5개 진열관과 강남 5대 명원 중의 하나인 아름다운 천위엔을 구경하려면 4km는 걸어야 하고, 2시간을 소비해야 한다. 진열관에는 진귀한 문물ㆍ자료ㆍ사진ㆍ도표ㆍ복제품 ?등이 잘 전시되어 있어 파란만장했던 중국근대사의 한 면을 볼 수 있다. `밭이 있으면 같이 갈고, 밥이 있으면 같이 먹고, 옷이 있으면 같이 입는다(有田同耕, 有飯同吃, 有衣同穿)'는 혁명강령도 보인다. 반봉건과 반침략의? 선구자 중 한 명인 홍수전의 분노와 불만으로 가득한 흉상도 보였다.

난징 남쪽의 위화타이(雨花台)로 갔다. 정식명칭은 위화타이 열사기념관이다. 이곳 전체를 `위화타이 열사릉원' 또는 `풍경구'(風景區)라고도 한다. 국민당 군대가 공산당원과 애국지사를 처형한 이곳은 시안사변 기념일인 12월 12일에 맞춰 1949년 열사릉으로 지정되고 이듬해 7월 기념비가 세워졌다. 그후 확장공사를 벌여 U자형의 웅장한 2층 기념관도 지었다.

기념비는 42.3m나 되는 것으로 다시 세웠다. 기념비의 글씨는 덩샤오핑이 썼다. 기념비대 뒤쪽에는 칼 마르크스의 `공산당선언'과 마오쩌둥의 `신민주주의론'이 새겨져 있다. 열사묘가 모여있는 중심구역의 동서에는 명승구ㆍ화훼구ㆍ찻집ㆍ청소년 활동구가 있다. 우리 나라 독립기념관의 배치와 비슷하다.

열사들의 조상군과 기념비를 지나 북쪽으로 향하면 네모꼴 못이 있고, 또 한참 걸어가면 중국 전통건축양식으로 지은 면적 5,900㎡의 웅장한 기념관이 보인다. 기념관에는 수 백 열사들의 사진ㆍ업적ㆍ유품 등이 전시되어 있다. 이름ㆍ생년월일ㆍ출신지ㆍ행적 등을 ?자세히 밝힌 열사 인명록도 있다. 대부분 20, 30대 청년들이었지만 16세 소년과 19세 처녀도 있었다. 어느 나라, 어느 시대든 젊은이들의 희생은 우리 4ㆍ19국립묘지와 독립기념관을 본 후의 뜨거움 같은 것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성신여대교수, 문화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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