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역사에세이-유라시아 천년/ (3)동서문명의 십자로 이스탄불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역사에세이-유라시아 천년/ (3)동서문명의 십자로 이스탄불

입력
2000.10.04 00:00
0 0

이스탄불이 동양에 속하는가, 서양에 속하는가를 묻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이 곳은 4세기 초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새로운 로마'로 선택한 이후 콘스탄티노플로 불리며 기독교 국가인 동로마 제국(비잔티움 제국)의 수도로 군림하였고 15세기부터는 이슬람 국가인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수도가 되어 20세기 초까지 그 지위를 유지하였다.로마는 서쪽에서부터 동진해 왔고, 오스만 투르크인들은 아시아에서 서쪽으로 왔으니, 이 곳은 오랫동안 동서양인들의 다양한 삶의 방식이 교류하며 융합한, 문명의 십자로였다.

그런 만큼 이스탄불에서는 동과 서의 만남의 흔적들을 곳곳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그 중 하나가 정교회 소속 교회에서 이슬람 사원으로 바뀐 호라 사원(투르크 어로는 까리에 자미)에 남아 있는 '그리스도와 중재자 마리아'라는 제목의 성화 모자이크이다.

건물로 들어서면 입구 쪽 복도의 벽화에서 그리스도와 슬픈 표정의 성모가 사람들을 내려다 보고 있는데 그 발치에는 동로마 황실 구성원 두 명의 간구하는 모습이 자그마하게 그려져 있다. 그 중에서도 특히 관심을 끄는 것은 그리스도의 오른쪽 발치에 '몽골 귀부인 수녀 멜라네'라는 글귀와 함께 그려져 있는 여인의 모습이다. 이 여인은 누구인가.

오랫동안 지중해 문명권의 중심 역할을 하며 절대 강자로 군림하던 동로마 제국은 사방에서 공격을 받으며 쇠락의 길로 빠져 들었다. 13세기 중반에는 몽골인들이 새로운 위협으로 등장하였다. 이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자 동로마 황제들이 동원한 방법의 하나가 혼인정책이었고, 황제의 딸들이 일 한국이나 금장 한국의 칸 혹은 실질적 지배자에게 시집가게 되었다.

미하일 팔라이올로고스 황제의 딸이었던 마리아는 일 한국의 칸인 아바가에게 시집갔다가 남편이 죽은 후 친정으로 돌아와 '몽골인들의 성 마리아 교회'를 건립하였는데, 이 모자이크에서 맑고도 간절한 표정으로 그리스도의 발 앞에 엎드려 비는 여인은 바로 이 마리아일 것이라고 추정된다.

그녀는 정교회의 발전을 기원하며 조국의 안녕을 위해 탄원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여인의 정성도 결국 헛된 일이 되어 버렸다.

영락을 거듭하던 동로마제국은 마지막에는 수도인 콘스탄티노플 시로 사실상 그 영역이 줄어들고 말았다. 이 도시의 가장 든든한 방어수단은 삼겹으로 둘러쳐진 성벽이었으나, 거대한 대포를 기동력있게 움직일 수 있던 오스만 투르크 군대 앞에서는 무력했고, 동방정교회의 총본산인 콘스탄티노플은 1453년 "터번 쓴 무슬림들"의 수중으로 넘어갔다.

술탄의 수도가 되면서 이름도 이스탄불로 바뀌었고 지배민족도, 주류 문명의 성격도 전혀 다른 것이 되어 버렸다. 오스만 투르크의 술탄은 톱카프 궁이라는 화려한 궁전을 건축하였는데, 오늘날 동로마 황제 권력의 흔적은 무너진 성벽에 바로 면한 블라헤르나이 궁의 폐허 속에서밖에 찾을 수 없는 데 반해, 톱카프 궁에서는 술탄들의 화려한 유물들이 계속 전시되고 있어서, 후계자를 가진 권력과 그렇지 못한 권력의 운명이 후대에 이르러 이렇게 차이가 남을 절감케 한다.

이스탄불의 새로운 지배자 오스만 투르크인들은 피정복민들의 문화, 특히 종교에 대해서는 비교적 관대하였다. 그들은 정교 교회들 가운데 상당수를 파괴하지 않고 이슬람 사원으로 개조했다. 성화 모자이크를 석회벽으로 덮어 버리고 구조물에 약간의 변형을 가한 후 내부에 코란귀절을 쓴 장식을 하고 첨탑을 세우면 개조가 완료되었다.

이렇게 해서 전혀 다른 신을 섬기게 된 사원의 대표적인 사례가 소피아 사원이다. 마르마라 해 남쪽 기슭에 얼룩진 인디언 핑크 빛 외벽을 하고 솟아 있는, 이스탄불에서 가장 유명한 건축물 중의 하나이다.

이 건물을 오늘날과 같은 규모로 이루어 낸 이는 6세기 동로마제국의 중흥군주 유스티니아누스 대제였다. 그는 자신의 꿈속에서 계시된 대로, 거대한 돔을 건물 중심부 꼭대기에 가진 교회를 건축할 것을 명령하였다는데, 5년만에 신속하게 완공된 이 교회건물의 웅장함에 스스로 놀란 황제는 "솔로몬이여 나는 당신을 능가하게 되었소"라고 외쳤다고 한다.

이슬람화하였던 소피아사원은 터키 공화국의 수립 이후 더 이상 기독교 교회도 이슬람 사원도 아니되, 두 종교의 경배장소였던 역사를 그대로 보여줄 수 있는 박물관으로 개조되었다. 회벽으로 덮였던 모자이크는 차례로 복원되었고 코란귀절을 쓴 벽면 장식도 그것대로 보존되었다.

기독교 성화 모자이크와 회교식 사원 장식이 한 건물 내에 공존함으로써 서로 다른 문화와 종교의 공존이 얼마든지 가능함을 보여주는 곳, 동시에 특정종교에의 의존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터키 공화국의 근대지향적 의지 또한 드러나는 곳, 여러 겹의 시간대와 여러 겹의 굴곡된 역사가 하나의 공간 안에서 화해하고 있는 곳, 그것이 소피아 사원이다.

그런 역사 때문인지 소피아 사원에서 처음 받는 인상은 아름답다기보다는 심한 상처를 입고 오랜 고통을 견뎌왔던 영웅 앞에서 느낄 법한 비장함과 외경심, 그리고 그 고통이 끝났음을 아는 데서 느끼는 안도감이다.

이스탄불 가운데 아시아 쪽은 오스만 투르크의 정복 이후에 건설되었으며 오늘날에는 주로 신흥 주택가가 조성되어 있다. 19세기까지만 하더라도 이스탄불을 방문한 여행객들은 이 도시는 바다에서 바라볼 때는 한없이 아름답지만, 일단 육지에 발을 들여 놓으면 거리가 너무 좁고 지저분할 뿐더러, 주인 없는 개들이 거리마다 들끓어서(심지어는 개들이 사람을 잡아 먹었다고 한다!) 문제라고 한결같이 지적하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날의 이스탄불은 그러한 흔적을 말끔히 지워내고 있다. 특히 보스포러스 해협의 아시아쪽 해변에는 부자들의 별장이 즐비한데, 높지 않은 단독주택들이 주를 이루고 있어 스카이라인을 해치지 않는 것이 신통해 보인다. 김호동교수는 이스탄불만큼 야경이 아름다운 도시는 달리 없다고 찬미한다.

이스탄불에는 3000여개가 넘는 회교사원이 있고 지금도 매일같이 새로운 모스크의 첨탑이 올라가고 있다. 그러나 이 국제도시는 결코 특정종교의 테두리 안에 갇혀 있지 않다.

이스탄불은 예전에 그러했듯 지금도 유럽과 아시아 모두를 향해 열려 있다. 이 곳 사람들은 어디서나 대도시 주민이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따스하고 정이 넘치는 태도로 지구의 동쪽 끝에서 온 여행객에게 미소와 함께 먼저 말을 건네온다.

그들은 당신들도 형제로 여기고 있을 것이다. 조상들이 먼 옛날 중앙 아시아의 초원에서부터 이 곳으로 왔다는 것을 잊지 않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자신들의 정부가 서쪽을 향해 손짓하며 유럽연합의 문을 줄기차게 두드리고 있는 오늘날에도.

한정숙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협찬 삼성전자 아시아나항공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