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경제의 대외신인도가 곤두박질치던 1997년, 당시 강경식 경제팀은 줄곧 ‘정치권 발목론’을 제기했다.‘대외신뢰를 회복하려면 금융개혁법안이 처리되어야 한다. 그런데 표만 의식한 국회가 금융개혁법안 통과를 미루고 있다. 따라서 경제난 책임은 정치권에 있다’는 3단 논법이었다.
너무도 명쾌하고, 그럴듯해 보이는 ‘정치권 책임론’이지만, 그 이면엔 ‘경제관료 면책론’이 깔려 있다. 내놓고는 얘기하지 않았지만, 결국 행정부는 할 만큼 다 했는데 국회(정치인)들이 잘못해서 경제가 이 지경이 됐다는 것이 당시 관료들의 인식이었다.
경제여건이 급속히 악화하고 있는 요즘 관가에는 ‘신(新) 정치권 발목론’이 등장하고 있다. ‘40조원 공적자금을 추가투입하고 금융지주회사만 만들면 금융구조조정은 마무리된다.
그런데 공적자금 동의안과 금융지주회사법을 처리해줘야 할 국회가 공전되고 있다.따라서 금융구조조정 지연으로 대외신뢰도가 떨어지면 국회 책임이다.’는 논리구조까지도 3년전과 너무 흡사하다.
비록 환란 전과 같은 교만은 없어졌지만, ‘우리는 할 만큼 다 하고 있다’는 경제관료들의 자기면책적 발상은 크게 달라진 것이 없어 보인다.
정치가 경제에 재를 뿌리는 것은 사실이고, 어떤 이유로도 정치권이 책임을 면할 방법은 없다. 그렇다고 모든 화살을 정치권으로 돌려도 될 만큼, 행정부가 떳떳하지는 않다.
대우자동차·한보철강 매각에서 협상력 부재로 농락만 당한 채 막대한 경제손실을 입은 죄, 100조원이 넘는 공적 자금을 쏟아붓고도, 더구나 두달전만해도 더 이상은 필요없다고 말하더니 이제와서 40조원을 더 달라고 국민들에게 손을 벌린 죄 등은 정치파행과는 무관한 명백한 ‘정부의 실패’ ,‘관료의 실패’다.
정치권의 도덕적 해이만 탓하는 것 자체가 관료의 도덕적 해이다. 3년전 위기도 그렇게 왔다.
경제부 이성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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