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을 꺾었다. 1993년 12월 어느 아침, 소설가 박범신씨는 신문연재소설을 중단했다. 비분강개도 아니고, 양심선언도 아니다. 글에 대한, 자신에 대한 항복이었다. 20년을 정신없이 달려온 인기작가에게 40대 후반에 찾아온 임종 (臨終) 과도 같은 절망이었다.그의 보폭은 넓었고, 발걸음은 빠른 직진이었다. 그것이 그의 삶의 방식이자 생애의 속도였다. 작가로서의 임종사를 써 던지고 면도칼을 주머니에 넣고 찾아온 해인사에서 그는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게 걷는 사내를 만난다. 그 사내는 작가의 '본래의 자아' 이자 그가 가고자 하는, 적멸이 아니라 불멸로 가는 '흰소가 끄는 수레' 와도 같았다.
■해인사에서
해인사로 가는 길에 그의 대학 제자 두 명이 동행했다. 제자라고 하지만 이제는 고행의 길을 함께 가는 작가들이다. 김현영 (27)씨는 소설 '냉장고' 로 등단했고, 이영주 (26) 씨는 올해 문학동네 문예공모 시부문에 '맹인' 등이 당선된 시인이었다.
그들은 절망한 스승이 찾아간 곳에서 그 절망과 깨달음을 확인하고 싶었고, 어쩌면 먼 훗날 자신들에게도 찾아올 절망에 대해 생각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의 걸음은 여전히 빨랐다. 그가 열 여덟에 손목을 그었을 때 그를 계룡산 국사봉 외딴집에 두고 내려가던 아버지의 그것처럼, 마르고 굽은 그의 어깨가 젊은 제자들을 저 뒤로 밀어냈다. 7년전 그의 발걸음도 이랬다.
나이와 걸음 속도가 세월과 삶의 속도와 반비례 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여기는 그의 아내가 보았다면 "이러다가 또 멈추겠어요" 라고 말했을 것이다. 그것을 꾸짖기라도 하듯 승려 하나가 구름을 밟듯 내려온다.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다. 그는 벌써 '흰소가 끄는 수레' 를 탄 것일까
작가에게 '그날'은 꿈이나 죽음 속이었다. 그가 눈을 쓸어내린 불망비와 또 다른 그인 사내가 바라보던 고사목은 그의 기억와 달리 멀리 떨어져 있고, 길도 변한 것 같았다. "죽어서, 마치 영혼이 서방으로 가는 듯한 느낌이었다" 고 했다.
그것은 믿었던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았다는 기분인 동시에 인기 작가라는 사회적 자아가 아닌, 본래의 자아로 돌아가는 길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때 정서는 아직도 뚜렷한데 사실은 불분명했다. 그의 이번 기행은 그 사실을 확인해 보는 시간이기도 했다. 그것은 그가 3년 뒤 왜, 어떻게 다시 작가로 돌아올 수 있었나 하는 해답을 찾는 일이기도 했다.
해인총림의 문을 지나 대적광전으로 가는 길은 사멸의 길이다. 살아있는 모든 것은 사멸을 향해 나아간다. 온갖 번뇌와 욕심을 모두 버리고 마주하는 불상. 그것을 지나야 '흰소가 끄는 수레'를 탈수 있다.
실제 대적광전 뒷벽에는 그런 그림이 없다. 대신 또 다른 사멸의 시간을 머금은 팔만대장경이 쌓여있다. 일본 관광객들은 그 규모와 시간에 놀라고, 고려인의 원한과 그리움을 스쳐 지나듯 하는 작가는 '저의 존재증명을 위해 모든 사물에다 사멸의 옷을 입히는' 시간을 생각한다.
"나에게는 불멸로 느껴지는데 같은 말인가요" 라고 묻는 제자. "영혼과의 무모한 싸움, 그것의 비원 (悲願) 이 바로 대장경이 아닐까. 사멸의 초상은 관념일까. 깨달음의 실체는 아닐까. '영혼' 을 말하면 아직도 가슴이 비어지는 이유는 뭘까." 라고 되묻는 작가.
제자가 다시 "우연히 갔는데 그것이 운명적이라고 느껴지는 경우가 있지 않아요" 라고 묻는다. 작가는 대답한다. "명징하게 말하긴 어렵지만 필연적인 이유로 해인사를 온 것 같다."
■무주로 가는 길
그렇다면 무주로 가는 길도 그러했을까. 거창을 지나 덕유산 자락을 넘으며 그는 바바리코트의 사내와 끝없이 충돌한다. 그는 그때 동행한 대학 후배 정영길 (원광대 교수)이 아니라 내면에 자리잡은 본래의 자아였다.
그와의 불화가 사라진 곳인 거창군 고제면 덕유산 자락의 개명마을에서 그는 물뿌리개를 가져온 개명초등학교를 찾아냈다. 몇 번 지나도 발견 못하던 곳이다. 2년전 폐교가 되고 거창하게 '극동두뇌과학소' 란 간판을 단 학교는 그 겨울 밤처럼 인적이 없다. 수도물은 말라버렸고, 자연보호탑 위에서 날개를 퍼득이던 까치 동상은 어디론가 날아갔다.
그 퇴락과 쓸쓸함에도 작가는 흥분했다. 소설의 클라이막스가 바로 여기이기 때문이다. 사내와 손을 잡으며 그가 분신처럼 느껴진 곳, 바로 현실의 자아와 본래의 자아가 만나 합일을 이룬 지점. 묘하게도 그곳이 닫힌 마음을 풀어내고 평화로운 빛을 여는 개명 (開明 ) 이다.
그때부터 작가는 본래 자아를 따라 면도칼을 버렸고, 꿈을 꾸듯 무주군 적상면 괴목 (槐木 ) 마을로 간다. 그곳은 작가가 1967년 처음 교사로 부임한 곳이며 데뷔작 '여름의 잔해' 의 초고인 '이 음산한 빛의 잔해' 를 쓴 곳이다. 꿀벌을 치며 그곳에서 시를 쓰는 제자 이봉명 (45)씨는 그의 절필선언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오기를 기다렸다. 문학의 매듭이 잘 풀리지 않을 때마다 바로 문학의 발원지인 이곳을 찾았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자궁같은 곳을 꿈길처럼 찾은 다음날 아침. 작가는 눈 쌓인 적성산이 가슴에 내려와 머리가 명경지수처럼 맑았다고 회상했다. 그러면서 어떻게 왔는지, 어디를 지나왔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그는 이처럼 절필을 죽음처럼 겪었고, 자기 문학의 고향인 무주로 가는 길에 본래의 자아를 만났고 적성산을 가슴에 담고 돌아왔다. 그 날 밤 이미 그는 '흰소가 끄는 수레' 를 타고 있었는지 모른다. "며칠 전 오시는 꿈을 꾸었다.
늙으면 꿈만 용해진다" 고 말하는 제자의 아내가 건네주는 감자와 진달래 술을 받으며 "선옥아, 가을이 깊으면 다시 오마" 라고 마치 시집 간 딸 집에 다녀가는 것처럼 말하는 작가. "이제 승부는 얼마나 자유롭고 얼마나 사랑하면서 사느냐 입니다."
/글= 이대현기자 leedh@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