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인의 아해가 도로로 질주하오(길은 막다른 골목길이 적당하오).' (시 '오감도' 중에서) 때 이르게 모더니스트로 살았다가 비참한 종말과 맞닥뜨린 모더니즘 시인 이상은 벽안의 연출가를 만나 이제 복권되는가.예술 창작 집단 '모두 아름다운 사람들'이 '이상, 열 셋까지 세다'를 공연한다. 시대를, 아니 주어진 숙명을, 거부한 죄로 불운을 혼자 도맡아야 했던 천재 시인 이상이 미국 연출가에 의해 되살아 온다.
"난 27살에 죽었습니다. 좀 이른 편이었지요. 의사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전 끝까지 줄담밸 피웠습니다." 이상이 저주처럼 내뱉는 진술은 과연 데카당스의 극이다. 이 연극은 시대를 앞선 대가로 비참해야 했던 이상이 벽안의 연출가를 만나, 가능해진 자기 진술서다.
"나는 스토리가 아닌, 퍼포먼스와 시 형식의 연극을 한다." 평소 이같은 신념을 작업의 근간으로 삼아 오던 미국 연출가 리 브루어를 만나, 무대화의 결실을 보게 된 것이다. 50일간 경기 양지의 KDI연수원에서 8명의 한국 배우, 7명의 스탭 등과 작업한 결과다.
리 브루어는 98년 재미 교포 2세 연극인 성노가 영문으로 번역한 이상의 시 '오감도', '꽃피는 나무'를 우연히 접하고 이상의 천재성을 직감, 연극화에 착수했다. 이상이 인형과 내면의 대화를 나누는 장면에서는 무대 위의 실연과, 미리 제작된 영상물이 어우러져 그 간 국내 연극 무대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환상적 서정미를 보여준다.
이번 한국 상연은 1월 '모두 아름다운 사람들'의 대표이자 극작가인 신뢰(43)가 예술의전당이 2,000만원을 걸고 공모한 '새로운 예술의 해' 지원작에 당선됨으로써, 첫발을 디뎠다.
직접적으로는 연극협회축제사무국의 심재찬 집행위원이 "초청작으로 쓰고 싶다"고 제의해 옴에 따라 이뤄졌다. 이 무대는 그래서 한미 연극인의 합작품으로 기록된다.
연극은 '꽃피는 나무'에 이르러 절정을 맞는다. 카메라의 렌즈는 하얀 종이만 비춘다. 자지러지는 각혈의 절정에서 여배우가 들어 와 이상을 보듬는다. 이 연극에서 가장 아름다운 광경이다.
음악 또한 심상찮다. 범패가 흘러나오는가 싶더니, 영화 '영웅본색'의 테마 음악으로 바뀐다. 기타리스트가 무대 한켠에 나와 펼치는 우리의 전통 구음 선율은 이상이 못 다 이룬 도솔천의 꿈을 대신한다. 여기에다 범패의 종소리까지 더 하니, 연극은 그대로 미완성의 '젊은 예술가의 초상'이다. 열셋까지 밖에 셀 수 없었던.
저주의 숫자 열 셋까지 헤아린 시인 이상은 죽기 직전까지 그 저주의 숫자를, 마지막 자존심처럼 웅크려 안는다. "봐라. 아직도 난 담배가 필요해. 이건 어때? 내가 필요한 건 단지 하나야. 그건 소수(素數)지. 좋은 숫자야." 10~15일 문예회관 소극장. 화~토 4시 30분 7시 30분, 일 오후 3시 6시. (02)762-0010
/장병욱기자 aj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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