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연휴에 KBS가 방영한 '백두에서 한라까지' 생방송을 즐겁게 보았다. 짐작컨데 어떤 형태로든 북한에 큰 사례를 지불하고 지극히 제한된 구역에서의 송신권을 따 낸 것을 국영방송이 그토록 자축하며 생색을 낼 필요가 있을까 싶기는 했어도 천지연의 장엄한 아름다움은 북한에 연고가 없는 나 같은 사람에게도 감동을 주었고 개성의 선죽교를 비롯한 문화유적과 박연폭포의 호쾌한 모습 역시 통일의 날을 간절히 기원하게 만들었다.아나운서들이 감격과 흥분의 어조로 북한의 경관 등을 찬양하는 것은 그들의 '스쿠프'(단독방송)의 가치를 높이려는 방송인의 버릇에서 비롯된 것이고, 개성 등 북한의 도시를 소개하는 프로그램을 전적으로 북한에 의뢰해서 제작한 것도 북한당국이 남한 방송이 직접 그런 프로를 제작하도록 허락한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기 때문에 그럴 수 밖에 없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데 연휴의 끝날, KBS가 그 특별생방송은 "방송사에 기록될 큰 사건이었다"면서 그러나 빈곤이나 기아의 상황을 포함한 북한의 실상을 균형적으로 보여주지 못했고 일부 프로그램을 북한 방송위원회에 의뢰해서 제작할 수 밖에 없었던 것, 그리고 그 프로그램들이 남북한에서 공히 방영되지 못하고 남한에만 방영된 것은 유감이라고 시인하는 것을 듣고,아마도 그 아나운서들의 어조에 경각심을 느꼈던 시민들의 항의가 있었던 모양이라는 짐작이 갔다.
나는 그 프로그램을 보면서 북한의 아름다운 산하와 뜻깊은 유적, 그리고 아나운서들의 당연한 감격과 환희 때문에 남한의 시청자들이 북한체제를 흠모하게 되리라고 생각지는 않았다. 또 시청자들이 북한방송이 제작한 개성 등 소개 프로그램에 나오는, 명승지에서 휴가를 즐기고 고급 음식점에서 외식을 하는 북한 주민의 생활을 북한 동포들의 전형적 생활로 오인할 위험이 있다고도 생각지 않았었다.
남한 동포들에게 한마디 하라고 부탁을 받은 북한의 기자나 관리들이 '친애하는 영도자'를 들먹이는 것 역시 우리 국민들에게는 북한 인민의 속박의 실상, 또는 북한체제 하에서의 인간성 왜곡의 실상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생각되어 그 자리에서 반박을 하고 논쟁을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렇지 않게 받아들이는 시청자가 있을 것을 우려한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KBS에 항의가 들어갔고 KBS는 그런 식으로 나마 자신의 '업적'에 주석을 달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나는 북한 사람이 '친애하는 영도자'를 찬양하고 북한 체제의 우월성을 주장하는 것을 접할 때마다 그것이 곧 북한 체제의 열등성과 억압성에 대한 반증이라고 생각하고 그 사람이 그렇게 하지 않았을 때의 불이익이 두려워서 그렇게 한다면 너무나 안쓰럽고 가슴아픈 일이고, 진심으로 그렇게 한다면 그것은 그의 주체성과 비판의식이 말살됐다는 증거로, 더욱 심각한 비극이라고 생각한다.
북한 텔레비전의 아나운서들이 뉴스 보도를 하면서 어김없이 사용하는 격앙된, 극적인 표정과 어조에 역겨움과 함께 절망적 이질감을 느끼지 않은 남한 시민이 있을까.
지금 남북관계의 급진전을 우려하는 사람들은 갑자기 또는 막상 통일이 되었을 때의 '통일비용'을 걱정하는데 양쪽의 경제적인 격차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의식의 격차이다.
우리는 북한과의 교류를 확대하고 통일의 날을 준비하면서 외부세계에 대한 적개심과 자신의 체제에 대한 무비판적 옹호가 주체의식이라는 관념이 뿌리박힌 북한동포의 정신적 전족을 어루만져 풀어줄 마음의 준비를 차분히 해나가야 하겠다.
대중매체 역시 북한 진출 경쟁에 열을 올리지 말고 진정한 남북동포의 화합을 유도하기위해 북한의 실상을 정확히 살펴보고 문제점들을 차근차근 짚어나갔으면 한다.
서지문 고려대 영문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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