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줄만 알았어. 북에 살아있다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어. 오려니 오려니 하면서 기다린게 벌써 반백년이네."2일 낮 12시 서울 동대문구 창신동 411 나무대문의 자그마한 한옥집. "엄마, 아버지가 내달이면 북에서 우리를 만나러 오신데요." 50년동안 그토록 기다려온 남편, 20여년 전부터는 죽은 줄만 알고 제사까지 올리던 남편 고광욱(高光旭·73)씨가 자신을 찾는다는 딸 재현(在賢·50)씨의 말에 이춘애(李春愛·72)씨는 그만 잠시 혼절하고 말았다. 이어 두 모녀의 오열이 이어졌다.
'그이가 살아있다니. 어떤 모습일까. 북에서 결혼은 했을까 ….' 이씨는 어느새 50년 수절(守節)의 한이 눈녹듯 사라진 모습이었다. 딸을 부둥켜 않은 채 "이젠 기쁠 것도 없어. 스물두살 때 청상을 만든 무정한 사람 아니야. 이제 와서 뭐하러 찾나 모르겠어."라며 환하게 웃던 이씨의 눈에는 어느새 다시 눈물이 맺히기 시작했다.
이씨가 남편 고씨와 백년가약을 맺은 것은1946년. 광주 남동에서 운수업을 하던 부자집 맏아들 고씨는 당시 광주에 있는 전남도청 공무원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우리 남편 똑똑했지. 양복 입고 다니고 신수도 훤했지. 48년인가 집안 어른이 국회의원 선거 나가서 선거운동을 도왔는데 모두들 침착하다 인물났다 칭찬이 자자했어. 그래도 남편이 잘못하면 시어머니한테 흉보고 이르고 그랬었는데."
남편과 헤어진 것은 50년 9월말. 인천상륙작전 후 인민군이 퇴각하면서 곳곳에서 밀고 밀리는 전투가 벌어지자 이씨는 시부모를 모시고 시댁이 있는 전남 장성으로 피난을 갔다. "먼저가 다음 차로 곧 따라갈게."남편의 마지막 말이었다. 당시 재현씨를 가진 임신 9개월의 만삭의 몸 두 살짜리 어리디 어린 아들 재정(在廷·52)씨의 손을 잡고 사흘을 걸어 장성에 도착했지만 남편은 오지 않았다.
"○○는 어디서 죽었어"라는 그 흔한 소문조차 들리지 않았다. "시댁 고향마을은 어느 편인지도 모를 군인들이 불을 질러 폐어가 됐지. 고이 간직했던 남편 사진도 이 때 모두 타 버렸어. 시부모님도 폭격으로 돌아가셨어." 부잣집 맏며느리였던 이씨는 어느새 의지할 곳마저 잃어버렸다.
주변의 도움으로 광주에서 포목점을 하다57년 친정언니를 찾아 서울로 올라온 이씨는 궂은 일을 가리지 않고 두 남매를 키웠다. "아들은 한양대 건축공학과 나와서 건축업을 하고 있고, 딸도 자식 셋 낳고 잘 살지."
이씨는 그러나 남편이 이번에는 직접 오지는 못하고 서신만을 보낼 것이라는 슬픈 소식에 다시 한본 통곡했다.
안준현기자 dejavu@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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