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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분.고독을 예술로 승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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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분.고독을 예술로 승화

입력
2000.10.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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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려108점이나 되는 난초 그림을 담고 있는 흥선 대원군(興宣 大院君) 이하응(李昰應)의 묵난화첩은 한 개인의 단일 난첩(蘭帖)으로는 세계 어느 박물관이나 개인 수장에도 유례가 없는 일이다.더구나 거의 손상되지 않은 채 좋은 상태를 유지하고 있어, 개혁정치가 또는 완고한 봉건 독재자로 상반된 역사적 평가를 얻고 있는 그를 재조명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될 것으로 보인다.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로부터 “해동의 난 그림은 閤下(합하·대원군을 높여 부르던 말)가 최고다. 내가 난초만은 대원군에게 양보해야 한다” 는 평가를 얻었을 만큼 이하응의 묵란은 일가를 이루었다.

특히 미술사가들은 대원군 생애 중 청나라에 잡혀가 톈진(天津)에 유배된 기간을 예술의 절정기로 보고 있는데, 이번에 발견된 묵란화첩은 톈진에서 돌아온지 6년후 운현궁에서 그린 것으로 당대 최고 명성을 얻었던 난초 그림답게 매끄럽고 활달하다.

어떤 경위로 단 일년만에 이렇게 많은 난초 그림을 한꺼번에 그렸는지는 알 수 없으나, 2~3일에 하루는 난을 쳤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그림마다 곁들인 화제(畵題)에는 대원군의 만년의 울분과 외롭고도 쓸쓸한 정서가 배어있다.

‘한가한 날 주렴 드리우니, 화분의 꽃에는 붉은 빛 떠오른다, 향로연기가 꼬불꼬불 감돌고, 오래된 벼루에는 묵(墨)이 짙다.

좋은 종이는 쌓이고 쌓이는데, 가슴 속에는 무슨 생각하는가?(暇日垂簾 盆花浮紅, 篆烟?淸 古硏墨濃, 名箋, 胸次何想)라고 난초그림이 자신의 흉중(胸中)일기임을 드러내고 있다.

또 대원군은 ‘십년 난(蘭)을 그리는 일은 혜업(慧業·슬기로운 생업)이 되었으며, 필법을 터득하고 글귀가 있게 됐다.

수년이래 혜업이 우리 집 화심(花心)이 되었으니 스스로 웃는다.(十載寫蘭便成慧業 得筆有句, 自笑年來成慧業吾家花心)’며 울분을 예술로 승화했음을 알리고 있다. 또 ‘나의 난(蘭)은 본래 법(法)이 없고, 단지 가슴속 생각을 그려낼 뿐이다. 그러나 어찌 스승이 없으리요?

공산의 만가지 줄기가 모두 나의 스승이니, 무엇을 모범으로 삼으리요.(我蘭本無法, 只寫胸臆, 而豈無師也, 空山万竿皆吾師, 何韓之)’라는 말로 자신의 난이 자연의 생명력을 표현한 사의적(思意的) 그림임을 밝히고 있다.

이 그림이 어떻게 해서 중국에까지 흘러가게 됐는지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중국의 부증상(傅增湘·1872~1949)은 난묵화첩을 골동품거리로 유명한 류리창에서 구입했으며 흥선대원군의 작품이라는 것을 뒤늦게 알게 돼 새로 표구하고 가보로 간직해 왔음을 밝히고 있다.

묵란화첩을 우리말로 번역할 계획을 세우고 있는 이건환(李鍵煥·55 ·중국문학 번역가)씨는 “냉금지에 그린 그림을 우리나라에서는 이렇게 두꺼운 마분지에 표구하지는 않았다”면서 “낱장 형태로 묶여있던 그림이 중국에 건너가면서 이런 식으로 표구된 것 같다”고 밝혔다.

부증상은 북경 고궁박물원(故宮博物院)도서관장, 교육총장(교육부 장관)등을 역임했으며 톈진 북양(北洋)여자사범학교, 경사(京師)여자사범학교를 창설하기도 한 교육자이다. 장서20만권을 쓰촨대와 베이징대에 각각 기증한 저명한 장서가이기도 하다.

그는 난첩에 ‘지나치는 문인 아객(손님)중 이를 보고 기절(奇絶)하다고 칭송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뒷날 방문한 어떤 조선의 손님으로부터 처음으로 이 그림이 조선말기 고종황제의 사친인 흥선 대원군이 그린 것을 알게 됐다. 따라서 이를 다시 새로이 표구를 하여 10책으로 모아, 서재의 보물이 되었으니, 후세 자자손손 이를 영원히 보물로 삼을지어다’라고 적고 있다.

이원기씨는 무역상이 반입한 이 묵란화첩을 얼마에 구입했는지는 밝히지 않고 있으나, 현재 대원군의 10폭 병풍이 1억 5,000만원을 호가하고 있어 10억대 이상 지불한 것으로 추측된다.

허영환 성신여대교수(문화재위원)는 “당시는 추사 김정희를 정점으로, 조희룡, 전기, 권돈인, 민영익, 민영환, 신헌, 허유 등 기라성 같은 문인화가가 배출된 문인화의 전성기”라면서 “격랑처럼 밀어닥치는 국제정세 속에서, 비록 국권상실의 비운은 겪었지만 이 시기의 문화예술은 재평가돼야 한다”고 말했다.

/송영주기자 yjso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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