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에서는 오래된 비석을 한 곳에 모아 둔 지역이 많은데 이것을 흔히 비림(碑林)이라 한다. 시안비림박물관은 중국에서 규모와 유물로 따져 최대의 비림이다.시안비림은 시안의 중심지에 있지만 비교적 조용하다.
한자문화권에서 사는 사람이나 서예를 하는 사람은 꼭 찾아봐야 할 곳이다. 우리 한국 대학 박물관 관계자들은 아침 문을 열자마자 들어가 두 시간을 보았다.
중국의 서법예술 뿐만 아니라 역사ㆍ문학ㆍ회화ㆍ조각까지 한꺼번에 다 볼 수 있는 역사문화의 보고였다.
-비림박물관 유물 3,000점 最多
공묘(孔廟) 자리에 세워진 이 비림은 1087년부터 건립되기 시작하였으니 900여 년의 역사를 자랑하고 있다. 소장ㆍ진열품은 3,000여 점이나 되는데 6개 비랑(碑廊), 7개 비실(碑室), 8개 비정(碑亭)에 나눠 전시되고 있다.
학자ㆍ정치가ㆍ서예가ㆍ화가 등의 석경(石經)ㆍ묘지(墓志)ㆍ서첩(書帖)ㆍ비석 등이 숲처럼 있다.
구양수(歐陽修) 왕유(王維) 소동파(蘇東坡) 동기창(董其昌) 등의 글씨를 보면서 그들의 생애와 예술을 알게 된다. 그야말로 '기인기서' (其人其書, 그 사람에 그 글씨)라 하겠다.
"시안비림에서 눈여겨 봐야 할 곳은 1963년에 개관한 석각예술 진열실이다. 100조각 여 점의 석각 진품이 있는데, 유명한 부조(浮彫)인 소우링6준(昭陵6駿)도 여기에 있다.
입체조각한 6마리의 말이다. 이 말들은 당 태종(627~649)이 탔던 전마(戰馬)이므로 1,400년 전 작품이다" 라고 한 학예관은 우리 일행에게 설명했다.
시안비림이 차지하고 있는 면적은 3만 2,000㎡, 건축 면적은 1만 8,000여㎡, 전시 면적은 4600여㎡이다.
비실 안쪽에서 들려오는 시끄러운 비탁(碑拓) 소리를 뒤로 하고 나오면서 나는 엉뚱하게 마오쩌둥의 '한자불망 중국필망' (漢字不亡 中國必亡, 어려운 한자가 없어지지 않으면 중국은 반드시 망한다는 뜻)이라는 말이 떠 올랐다.
-진용 중국 최대 현장 박물관
시안에서 동쪽으로 70㎞ 지점에 있는 진용(秦俑)박물관은 진시황병마용박물관의 약칭이다. 진시황릉의 동쪽 1.5㎞ 지점이다.
1974년 3월과 1976년 4월, 5월에 3개의 갱을 발견해서 1978년 5월 정식발굴을 개시했다. 1989년부터 대외개방을 시작해서 이처럼 거대한 현장박물관이 되었다.
세계 최대 현장박물관이자 세계 8대 기적의 하나가 되었다.
이 박물관에서 나온 전차(戰車)는 100여 대, 도마(陶馬)는 600여 필, 도용(陶俑)은 약 8,000 점에 이르고 있다.
진시황제가 천하통일(기원전 221)을 하기 전부터 시작하여 30년의 세월과 70만명의 인원이 동원되어 완성된 그의 무덤과 이 병마용갱은 중국 고대문화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보고이다.
한 연구원은 "일반적으로 1호 갱은 보병부대, 2호 갱은 돌격부대, 3호 갱은 지휘부라고도 한다. 평면은 모두 품(品)자 형으로 배열되어 있다. 1호 갱에 매장된 도용과 도마는 약 6,000 점이다.
2호 갱의 도용과 도마는 1,400여 점이다. 3호 갱에는 우수한 전차 1대도 있다. 전차와 병용으로 보아 지휘부라고 이름을 붙인 것이다" 라고 설명했다.
수천 개의 병용(兵俑) 가운데 나는 궤사용(?射俑)을 제일 좋다고 생각한다. 높이가 120㎝나 되어 실물 크기이면서도 지극히 사실적이다.
얼굴 표정, 갑옷 모양, 앉은 자세, 전체적인 비례 등이 완벽하다. 2200년 전 조각가의 솜씨에 놀랄 뿐이다.
관계자에 따르면 몇 년 후부터는 진시황릉도 발굴할 예정이라 했다. 위성탐사에 의해능의 지하구조와 매장물, 현실(玄室, 시체가 있는 방) 등을 완전히 파악하고 있다고 했다.
진시황릉이 발굴되어 또하나의 현장박물관이 생기면 얼마나 더 사람이 몰려들까. 놀랍고 부러운 일이다.
-양귀비가 놀던 온천 '화칭즈'
시안의 선사유적지인 빤퍼박물관에서 동북쪽으로 20km 정도 가면 유명한 놀이터인 화칭즈(華淸池)가 있다. 리산(驪山) 아래에 있는 온천지다.
서주(西周)시대에는 리꿍(驪宮)을, 진나라 때는 리산탕(湯)을, 당나라 때는 온천궁을 만든 곳이다. 당 현종 6년(747)에 이곳을 크게 넓히고 화칭꿍이라 했다.
현종과 의 며느리이자 애첩이었던 양귀비가 목욕하며 즐겼던 구룡탕과 귀비지(貴妃池, 꾸이피즈)는 지금도 잘 남아 있다.
화칭즈의 여기저기에는 봉화대, 석방(石舫 : 돌로 만든 배), 빈관(賓館 : 손님을 맞는 곳), 노군전(老君殿 : 노자를 모신 전각), 정자 등이 있다. 긴 시간을 오간정(五間亭)에서 보냈다.
청 때 세워진 이 건물에는 서태후도 와서 놀았고, 1936년 10월과 12월에는 장졔스(蔣介石) 총통도 와서 쉬었다. 그러면서 장쉬에량(張學良) 양후청(楊虎城) 등 고급장교들을 소집하여 군사회의를 열기도 했다.
그리고 중국현대사에서 장졔스와 마오쩌둥의 운명을 뒤바꾼 사건인 시안사변(西安事變)이 일어났다. 중국판 12·12사건이었다.
1936년 12월 12일 새벽 6시. 눈 내린 새벽 총소리에 놀란 장졔스는 오간정에서 혼자 맨발로 도망쳐 리산 중턱 절벽 바위 틈에 숨어 있었다. 지금의 병간정(兵諫亭) 자리다.
옌안(延安)에서 날아온 공산당의 저우언라이와 담판한 후 장졔스는 다시 국공합작(國共合作)을 했다. 그리고는 멸망의 길로 달렸다.
13년 후인 1949년, 장졔스는 천하를 공산당에게 넘겨주고 타이완으로 쫓겨 갔고, 1936년부터 그에게 납치되어 50년 간 옥살이를 했던 쟝쉬에량은 102세로 아직 살아 있다.
허영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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