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 밖에선 겨울비가 추적추적 내리는데 나는 밤새 원고를 한 장도 쓰지 못했다. 서재엔 구겨진 파지들만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꿈자리가 사나웠던지 아직 여명조차 트지 않은 시각에 잠을 깬 아내가 서재의 문을 열었다.아내는 오직 작가라는 하나의 이름으로 살아온 내 삶을 속속들이 알고있으니 모든 걸 한눈에 알았울 것이다. 말없이 팔을 벌리고 다가온 아내가 내 얼굴을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소설 그만 써요. 당신 그러다 죽겠어."1993년 12월 초의 어느 새벽이었다. 90년대 들어 나는 글쓰기의 고통스런 한계에 직면해있었다. 문학은 무엇이고 어느 제단에 바쳐져야 하는가.
나의 소설들은 과연 가치있는 것일까. 유한한 삶의 억압에서 자유로워질 길이 정말 있을까. 삶과 문학에 대한 불원적 질문들이 포위해왔을 때 나는 속수무책이었다. 아내는 귀기서린 내 표정을 보고 그날 새벽, 실존적인 억압에서 나를 구해낼 유일한 방법이 글쓰기로부터 해방이라는 걸 깨달았던 것이다.
나는 아내의 품에서 한참이나 어린애처럼 목놓아 울고나서 돌아앉아 12매나 되는 '절필의 변'을 썼다. 때마침 한 일간신문에 소설을 연재하고 있었으므로 그런 식의 선언적인 글을 안쓸 수 없었던 것이다. 새벽에 나는 신문사로 갔다. 아내가 한숨 자고 나가라는 걸 뿌리치고 나선 건 행여 세속적 책임감 때문에 내 마음이 변할까 봐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나는 아무도 출근하지 않은 신문사에서 떨며 기다렸다. 돌이켜보면 70, 80년대를 나는 어떻게 살았던가.
원고약속을 단 한번도 지키지 않은 적이 없어 독하다는 말을 듣고 살았다. 소설이 세상과 맞서는 나의 유일한 창(槍)이라 믿었고 안 쓰면 내 삶이 송두리째 주저앉는 줄 알았다. 그러니 어찌 떨지 않겠는가. 이십여년간 유일하게 내가 들고있던 창을 버리는 일이었으므로 신문사 앞에 혼자 서 있을 때, 나는 외로웠으며 또 도망치고 싶었다.
그러나 당시 그 신문사 사장 앞에 안내됐을 때 12매짜리 '절필의 변'을 내놓으면서 나는 이렇게 말했다. "권총을 뒤 꼭지에 겨누고 쓰라고 해도 지금은 단 한 장의 원고도 쓸 수 없습니다."
소위 '절필'이라고 세간에 알려졌던 일의 전말이다. 그때의 고통스러웠던 경험은 내가 후에 쓴 중편소설 '흰 소가 끄는 수레'에 더 상세히 고백돼 있거니와 그날 이후 나는 3년 남짓 단 한 장의 원고도 쓰지않고 지냈다.
소설가 박범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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