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라당 이회창 총재가 25일 영수회담 카드를 꺼낸 것은 고심 끝의 선택이다. 이 총재는 장외투쟁과 등원의 갈림길에서 번민하다 제 3의 길인 영수회담을 택했다.이 총재는 부산 집회(21일) 이후 당 안팎으로부터 간단찮은 등원압박을 받아왔다. 몇몇 핵심 당직자는 이미 집회전부터 ‘부산대회 후 전격등원 선언’을 이 총재에게 진언한 상태였다.
장외집회의 힘과 여세를 몰아 독자 등원을 결정함으로써 명분과 모양새를 함께 살리자는 일거양득론이었다. 게다가 박근혜 부총재, 김덕룡 손학규 박관용 의원 등 비주류 중진들이 부산집회 이튿날 회동, 등원을 공개요구했다.
하지만 장외 투쟁파의 반대도 이에 못지 않았다. “아무 것도 얻은 게 없는데 불쑥 국회로 들어갈 수는 없다. 조금만 더 밀어붙이면 소기의 성과를 거둘 수 있다”는 게 등원 불가론의 요체.
이 총재는 등원론자들의 요구 등에 따라 25일 아침 의원총회를 소집해 놓은 상태에서 마지막 의견수렴을 위해 24일 저녁 신라호텔에서 비밀리에 총재단 회의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대다수 부총재들은 등원의 불가피성을 역설했다. 다만, 무조건 등원과 조건부 등원의 차이가 있었을 뿐이었다.
이 과정에서 일부 당직자들은 “28일 대구집회를 강행하되, ‘대구집회에서 중대발표를 하겠다’는 예고를 하자”는 또 다른 아이디어를 내기도 했다. 그렇게 하면 시간적 여유를 가지고 등원론을 상대할 수 있고, 여권에 대한 압박효과도 거둘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 총재는 이 가운데 어느 한쪽이 아닌, 모두를 포괄할 수 있는 방안도출에 부심했고, 그 결과가 영수회담 제의였다. 장외와 원내의 두가지 가능성을 함께 열어 놓은 상태에서 김대중 대통령과 정면으로 각을 세움으로써 정국의 이니셔티브를 지속적으로 쥐고 나가겠다는 것이었다.
이 총재의 핵심 측근은 “영수회담 자체에 회의적 견해를 가지고 있는 이 총재가 먼저 영수회담을 제의한 것은 그만큼 고민이 많았다는 반증”이라고 말했다.
홍희곤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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