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일 시드니 슈퍼돔.전인미답의 한국체조 올림픽 첫 금메달을 위해 '평행봉의 달인' 이주형이 8명의 결선진출자 중 4번째로 평행봉 앞에 섰다.
칼날 같은 모리스에 파이크(뒤로2바퀴돌아 봉에 걸치기)와 게일로드(앞으로2바퀴돌아 봉에 걸치기)등 봉 위의 현란한 연기를 끝낸 뒤 마침내 이주형이 무릎펴고 몸접은 '파이크' 자세로 2바퀴 공중돌아 내렸다.
매트에 착지한 이주형의 가지런한 두발은 자석에 달라붙은듯 매트위에서 한치의 미동도 없었다. 이주형은 금메달에 대한 예감을 느꼈는지 두 손을 번쩍 쳐들며 기뻐했다. 지난 16일 평행봉 예선 1위를 차지할 때의 그 환호 그대로였다.
'9.812점'. 예선1위를 차지했을때의 기록보다 0.012점이 더 나왔다. 2번째로 연기를 펼친 강호 이반코프(벨로루시)와 6번째로 출전한 러시아의 체조황제 알렉세이 네모프는 9.775와 9.800점으로 예상대로 이주형보다는 한 수 아래. 금메달이 눈앞에 다가왔다. 이제 유일하게 남은 상대는7번째로 나선 중국의 리샤오핑. 예선을 3위로 통과한 리샤오핑만 넘는다면 한국체조 역사상 첫 금메달이 확정된다.
하지만 봉위에 오른 리샤오핑은 이주형과 대적할만큼 능숙하게 연기를 펼쳤다. 착지도 완벽하게 마무리한 리샤오핑 역시 두 팔을 활짝피며 기뻐했다.
전광판에 리샤오핑의 점수가 새겨진 순간. 중국코치진이 달려나와 리샤오핑을 얼싸안았다. '9.825점'. 이주형보다 0.013점이 높았다. 한국체조 첫 금메달의 꿈은 끝내 이뤄지지 못했고 이주형은 은메달에 만족해야 했다.
한편 이주형은 이어 벌어진 철봉에서도 9.775점으로 동메달을 추가했다.
/시드니=특별취재반
■인터뷰/ 이주형 "후배들은 더 잘할것"
"후회는 없습니다. 리샤오핑이 너무 잘한 것 같습니다."손에 잡았던 금메달을 놓친 것이 못내 아쉬운 듯 이주형은 입술을 지긋이 깨물며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며 현역은퇴를 시사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경기는 어땠나.
"4번째로 연기했는데 뒷 번호였으면 조금 더 잘할 수 있었을지 모르겠다. "
-리샤오펑에 대한 평가는.
"뒷번호로 출전, 금메달을 의식해 고난도 연기를 펼친 것 같다.
-한국체조에 대해 한마디한다면.
"개인이나 단체나 가능성이 매우 높다. 후배들이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다. "
/시드니=특별취재반
■이주형은 누구?
이주형(28o 대구은행)은 대구 명덕초등학교 시절 같은 반 친구가 체육관에서 체조하는 모습에 반해 체조선수가 됐다.
이주형은 어려운 가정형편에도 불구, 동생 이장형과 함께 지금까지 단 하루도 봉(棒)을 놓지 않고 올림픽 정상을 향해 피와 땀을 흘려왔다.
이주형은 중학시절 서부중 체조부를 이끌던 김영호(50o 현 와룡중 교무부장)감독을 만나 비로소 체조에 눈을 뜨게 됐다.
김 감독은 그에게 "잘못 배우면 안배우는 것만 못하다"며 항상 기본기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김 감독은 당시 이주형이 " 기교를 떠나 '자세'하나 만큼은 대표선수에 버금갔다"며 "크게 될 선수임을 느꼈다"고 말했다.
이주형은 중1때 무릎부상으로 1년간 뛰지 못했는데 이때 김 감독은 평행봉, 철봉, 안마와 같은 뛰지않아도 되는 종목의 기본기만을 가르쳤다. '평행봉의 달인'이 된 동기는 때아닌 부상에서 비롯됐다.
89년 국가대표에 발탁된 이주형은 이듬해 베이징 아시안게임 우승을 시작으로 지난해 톈진세계선수권 금메달에 이르기까지 평행봉에서 만큼은 세계최고의 실력을 자랑해왔다.
16일 올림픽 평행봉예선에서도 완벽한 연기로 1위를 차지하자 AP등 외신들도 이주형을 '평행봉의 최강자'로 평가했다. 하지만 92년 바르셀로나 개인종합 8위, 96년 애틀랜타 평행봉 7위 등 올림픽과는 유달리 인연이 없었는데 이번에도 정상 일보전에서 눈물을 삼켜야 했다.
우직한 성격에 말이 없는 이주형은 이번 올림픽을 끝으로 대표생활을 마감한다.
시드니=특별취재반
■주형(27), 장형(26) 두 아들의 어머니 이귀자(58)씨는 14일 태백산 기슭의 현불사를 찾아가 아들의 선전을 위해 불공을 드렸다.
비록 은메달에 그친 주형이와 안마에서 4위의 성적을 거둔 장형이를 키우기까지 이씨의 한평생은 눈물로 얼룩졌다.
두 아들의 초등학교 시절 이씨는 때로는 파출부로 일하며 근근히 생계를 이어갔다. 두 아들 모두 "체조를 하고 싶다"고 말했을 때 걱정도 많고 반대도 해봤지만 자식들의 뜻을 꺾을 순 없었다.
이씨는 초등학교를 졸업한 둘째 장형이를 큰애가 다니던 서부중학교로 진학시키지 못했다. 집안 형편이 너무 어려워 등록금이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고심끝에 장형이는 숙식과 등록금을 모두 제공해 준다는 포항의 포철중학교로 보냈다.
한살 터울의 둘째아들을 가정형편 때문에 외지로 보내야 하는 어머니의 가슴은 찢어질 듯 했다. 86년엔 설상가상으로 조그마한 신발가게를 운영하던 남편 이신길씨가 교통사고를 당했다. 뇌를 두 번이나 수술해야 할 만큼 큰 사고였기에 이씨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이신길씨는 지금도 일어서면 허리를 90도 이상 못 펼 정도로 거동이 불편하다.
하지만 이귀자씨는 그저 두 아들이 대견스럽기만 하다. 효성이 지극한 두 아들이 지금은 모두 실업팀에 소속돼 있어 살림에 많은 보탬을 주고 있고 이제는 두 아들이 한국체조를 이끌어가는 주인공이 됐기에 더욱 자랑스럽다. 이씨는 지금도 예전처럼 눈물을 흘린다. 그러나 그것은 고통과 걱정의 눈물이 아니라 기쁨의 눈물이다.
/이준택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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