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 비평사가 펴내는 '창비시선' 이 200권을 돌파했다.1975년 제1권으로 나온 시인 신경림씨의 '농무(農舞)'부터 올해 8월 199권째로 발간된 배창환 시인의 '흔들림에 대한 작은 생각'까지, 창비시선은 70년대 중반 이후 한국 시의 커다란 흐름을 주도해왔다. 200권째로 발간된 시집은 신경림씨기 엮은 '불은 언제나 되살아난다' 이다. 신씨는 창비시선에 참여한 시인 외에도 25년간 우리 시의 흐름을 한눈에 보여줄 수 있도록 이 기간에 활동해온 시인 88명의 시 한 편씩을 고른 앤솔로지 형태로 기념시집을 꾸몄다.
이른바 '창비' '문지' 식의 문학계파적 구분을 떠나, 대중적 호응의 유무에도 관계없이 20세기 후반에서 21세기로 이어지는 한국 시의 본모습을 보여주려는 의도가 역력하다.
고은 시인의 '문의(文義) 마을에 가서'가 첫머리로 올랐고, 신씨 자신은 '농무'에 실린 '파장(罷場)'을 자선했다.
이성부 강은교 황동규 조태일 시인의 시가 이어지고 82년 발간된 김지하 시인의 '타는 목마름으로', 황지우씨의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1983), 노동자시인 박노해씨의 '시다의 꿈'(1984)이 80년대 초반의 분위기를 되새기게 한다. 김용택씨의 '섬진강 5', 이성복씨의 '남해 금산' 의 빛나는 서정을 거쳐 90년대를 연 유하씨의 '바람 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 와 최영미씨의 베스트셀러 시집 '서른, 잔치는 끝났다' 중 '선운사' 가 뒤를 잇고 있다.
최영철씨의 '백일홍' 과 정복여씨의 '귀가' 는 올해 발간된 시집 중에서 고른 시다.
시선집 제목은 신경림씨가 엘뤼아르의 시구에서 빌려온 것. '시의 시대는 끝났다'는 탄식은 우리 현대시의 어느 시기에나 있었지만, 변화하는 시대의 참 아름다움을 창조하고 진실을 말하는 진정한 시의 역할은 앞으로도 불길처럼 영원하리라는 믿음이 담겨 있다.
신씨는 엮은이의 말을 통해 지난 4반세기의 한국시사를 간명하게 정리하고 있다.
그는 "당초 73년 자비로 500부를 출간했다가 증보해 창비시선 1권으로 나온 내 시집 '농무' 가 인세를 받았다고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며 "창비시선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나온 '문학과지성 시인선' , 민음사의 '오늘의 시인선' 과 함께 국내 시집의 상업출판 시대를 열었다"고 회고했다.
특히 창비시선은 독재와 싸우는 민주화운동의 과정에서 한국 시가 사회성을 복원하는 중요한 계기를 만들었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러나 "70, 80년대 사회성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경직된 시정신만으로 시가 된다고 생각하거나, 최근에는 말장난에 치중해 시가 한없이 가벼워지고 잔망스러워지는 경향이 창비시선에도 없지 않았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그는 "90년대 이후 시의 거품 독자가 빠지면서 '시의 위기론' 이 나오고 있는 것은 당연한 추세" 라며 "한국 시는 비록 소수를 상대로 하더라도 그 대화가 산문, 영화, 인터넷이 가지지 못한 진실과 힘을 갖는다면 '시가 예술형태의 최고 수준을 규범한다' 는 사실만은 변치 않을 것"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하종오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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