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이란 지리적 위치에 따른 상대적 개념이며 언제나 '동양'과 짝을 이루어 사용된다. 오늘날 이 쌍생어 가운데 무게중심은 서양 쪽에 놓이지만, 원래는 중화적 세계관을 반영하는 용어이다. 중국이 천하의 중심이라는 대전제 위에서 대양으로 나가는 항로를 기준으로 좌 우를 나누었다.이러한 용례는 원대(元代)에 나타나기 시작하여 명초(明初)에 일반화했다. 중국의 정화(鄭和)는 15세기 전반기에 일곱 차례나 함대를 이끌고 아라비아만과 아프리카 동해안 지역에까지 원정을 벌였고, 그 지역을 서양으로 통칭했다. 이 시기가 중화세계의 최대 팽창기로서 동양과 서양은 그 세계의 외연을 이루었다.
중국은 정화의 원정 이후로 바다로의 진출을 포기하고 내륙으로 침잠해 들어갔다. 이 공백을 메운 것이 15세기말에 아프리카를 돌아 인도양에 나타난 유럽인들이었다. 이들은 내친 김에 16세기 초에 중국에 이르러 서양 너머에 또 다른 서양이 있음을 알려주었다.
18세기말 정조대에 편찬된 여지도(輿地圖) 3첩에 들어있는 천하도지도(天下都地圖)는 중국에 선교사로 왔던 예수회 신부 알레니(Aleni)가 1623년에 저술한 '직방외기(職方外記)'에 삽입한 만국전도(萬國全圖)를 바탕으로 그린 것이다. 지도를 보면, 지리지식이 확대되어 과거의 서양이 '소서양(小西洋)'으로, 그 너머의 유럽이 '대서양(大西洋)'으로, 그리고 동양이 '소동양(小東洋)'으로, 그 너머의 태평양이 '대동양(大東洋)'으로 표기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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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몽골마을 얀바예바
중국 중심의 세계관과 유럽의 새로운 지리관이 절묘하게 결합한 것이다. 하지만 바로 이 때 유럽은 이제까지 그 어떤 문명도 겪지 못했던 새로운 역사적 실험의 단계에 접어들었고 이후 '서세동점(西勢東漸)'을 계속하여 동양 3국에게 '동도서기(東道西器)' '중체서용(中體西用)' '화혼양재(和魂洋才)'라는 대안 모색을 강요하였다. 이 용어들은 이제 서양과 동양이라는 이분법적 문명관이 확정되었음을 보여준다.
유럽은 중세에만 해도 지중해문명의 변방에 불과했다. 로만포럼의 활기는 사라진 지 오래다. 11세기말에서 13세기말에 걸쳐 유럽이 전개한 십자군운동은 당시 이슬람과 비교하여 기독교세력이 후진적이었음을 잘 드러내준다. 이러한 유럽이 19세기에 세계를 정복했으니, 참으로 '기적'에 가깝다. 그러기에 '서구의 대두'는 지난 천년기의 최대 사건이라 할만하다. 14세기에조차 당시 최대의 여행가인 이븐 바투타는 유럽을 여행할만한 가치도 없는 반(半)문명지역으로 치부했고, 기독교도들도 열등함을 자인했다.
이런 유럽이 불과 300년 후에 전 세계를 장악했으며, 존재했던 모든 문명을 능가하는 근대세계를 만들어냈다. 어떻게 해서 그럴 수 있었을까?
이번 여행을 통해 가장 강렬하게 느낀 것은 '국가'라는 존재의 무게였다. 우리처럼 국가적 전통이 매우 강력하여 마치 공기처럼 그 존재를 당연시하던 필자에게 유목민들의 흥망이 끊임없이 명멸했던 초원의 세계는 흡사 권력의 진공지대로 느껴졌다. 물론 거기에도 국가는 있었고 또 존재한다. 하지만 그 국가는 유럽인들이 만들어낸 '근대국가'와는 크게 다른 것이었고 여전히 그러하다. 바로 이 차이에 유럽문명의 비결이 있지 않나 자문하곤 했다.
그 차이는 풍성한 유적을 통해 드러나는 유럽의 역사성과 비유럽세계의 '뿌리뽑힘'의 대비에서 극명하게 나타난다. 반만년의 역사를 자랑한다는 우리나 세계 최대제국을 건설했노라고 뽐내는 몽고, 티무르 제국의 영광을 재현하겠다는 우즈베키스탄, 심지어 '영원한 도시' 이스탄불에서조차 과거는 흔적을 잃어가고 오늘과 무관한 것이 되어 버린 반면에, 근대성을 만들어낸 유럽에서 오히려 전통의 무게를 실감하기가 훨씬 쉽다.
남아있는 과거의 흔적이 현재의 역사성을 풍요롭게 하면서 유럽인들의 문화적 자긍심을 높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 과거의 흔적이라는 것이 기실 근대국가를 통해 만들어지고 다듬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유럽은 그것을 비유럽세계의 '달빛에 바래 신화가 되어버린 과거'와 대비하여 유럽문화의 우월함의 징표로 과대포장한다.
이는 하나의 문화가 폐쇄성을 지양하고 개방성을 유지하면서 자족적 단위로 기능하려면 반드시 국가라는 외피를 걸쳐야 함을 뜻하는 동시에, 근대국가라는 것이 얼마나 철저하게 과거에 대한 통제를 통해 현재를 관리하고 있는가를 잘 보여준다.
필자가 1980년대에 프랑스를 처음 찾았을 때 부러워한 것은 파리의 자유분방함이었다. 하지만 이번에 유라시아를 관통한 후 다시 프랑스를 대했을 때(최갑수 교수는 일행과 별개로 프랑스를 1주일간 더 답사했다-편집자주) 불현듯 다가선 것은 근대국가가 쳐놓은 묵직한 해석의 그물망이었다.
거대한 자연 속에 아무런 가공의 흔적 없이 홀로 우뚝 서 있는 울란바토르 남쪽의 돈유쿠 석비 앞에서 해방감을 맛보았다면, 루이9세가 제7차 십자군을 출항시키기 위해 건설한 애그-모르트 성채의 방문객을 위해 답사로까지 세세히 적시한 안내책자에서 형언할 수 없는 답답함을 감내해야 했다.
바로 이러한 국가, 구성원들이 조금도 부자유스럽다고 느끼지 않으면서도 그들을 총체적인 방식으로 조직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나라, 곧 '유기적 국가(有機的 國家)'를 이룩했던 것에 서구 대두의 비결이 있다.
물론 이 국가는 진공상태에서 빚어진 것은 아니다. 기독교가 제공한 규범적 합의, 봉건제와 로마법의 결합으로 말미암은 소유권 개념, 지주와 농민간의 미묘한 힘의 균형, 시장관계의 확대에 따른 시민사회의 등장, 그리고 상호 경쟁적인 복수의 정치단위로 이루어진 경쟁적인 국가체제, 이 우연적이고도 절묘한 역사의 복합체가 국민국가를 만들어냈던 것이다.
통치의 대상이 곧 나라의 주인이라는 이 역설적인 정치결사체는 이제껏 존재해왔던 그 어떤 종류의 국가도 도달하지 못했던 엄청난 동원력을 발휘하여 - 그러기에 홉스는 이것을 '괴물'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 중국과 같은 거대한 제국마저도 휩쓸어버렸다.
유럽은 승리를 거둔 후에 자신의 과거만이 아니라 '타자'의 과거까지도 분과학문체제라는 장치를 통해 통제해 들어갔다. 이제 유럽 이전의 모든 문명은 유럽문명의 전사(前史)가 되었다. 유럽인의 역사는 인류의 역사가 되었고, 유럽은 지중해문명의 적자(嫡子)가 되었다.
비유럽세계는 두 부류로 나뉘어 아프리카와 기타 '야만인들'은 '역사 없는 사람들'로 간주되어 인류학의 연구대상이 되었고, 역사가 있음을 도저히 부정하기 어려운 중국, 인도, 이슬람, 이집트 등은 정체화된 '동양'이 되었다.
유럽은 유라시아의 일부임을 그치고 세계의 중심인 '서양'이 되었다. 서양이 진보를 발명했다고 하나 실은 후진성을 만들어냈다는 것이 보다 정확한 평가이다.
/최갑수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협찬 삼성전자 아시아나항공
한때 로마문명의 세례를 받았지만 중세에는 이슬람이나 중화문명권에 비해 변방이던 유럽은 19세기에 이르러 세계의 중심이 되었다. 로마의 유적지 포로 로마노. /박서강기자
■러시아 몽골마을 얀바예보
흔히 유럽으로 통칭되는 러시아에는 몽골 마을이 여럿 있다. 서부 시베리아의 중심 도시 튜멘에서 동북쪽으로 17km떨어진 곳에 위치한 얀바예바도 그중 하나다.
산지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고 너른 들판에서 농사와 목축을 하며 살아가는 이 마을에 몽골인이 정착한 것은 지금부터 400여년전이다. 이곳에 있는 몽골따따르역사박물관의 비키 치미라바 베네라 아지아프트나(69) 관장은 "지금의 우즈베키스탄 부하라에 사는 몽골인 가운데는 이슬람을 믿는 사람이 많았는데 그들이 이슬람을 서부 시베리아로 확산시키기 위해 옮겨왔다"고 전한다.
얀바예바의 몽골인은 몽골인과 러시아인의 두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다. 일상 생활에서는 몽골어를 쓰지만 공식 석상에서는 러시아어를 사용하는 것이 대표적 보기다. 몽골인 특유의 넙적한 얼굴도 약간 갸름해지고 누런 피부색도 약간은 하얗게 변했다.
그 때문에 아지아프트나 관장만 해도 스스로 몽골인이라고 밝히지 않으면 몽골인인지 아닌지를 알기 어려울 정도였다. 갈수록 이민족이 늘어나는 것도 같은 차원. 지금은 전체 주민 3,000여명중 절반 가량만 몽골인이고 나머지는 우크라이나인 러시아인 카자스흐스탄인 아제르바이잔인 독일인 등 동·서양의 여러 민족이 섞여 살고있다. 하지만 고려인은 없다고.
유라시아를 호령하던 몽골대제국의 영화가 그립지 않느냐는 질문에 아지아프트나관장은 "전혀"라고 짧게 대답한다. 몽골의 영화는 옛 이야기일 뿐이고 이제는 민족이 달라도 한 마을에서 평화롭게 사는 것이 가장 좋다고 말한다.
우리 일행이 마을을 찾았을 당시 한 무리의 꼬마 녀석들이 가장 먼저 반응을 보였는데 그들 역시 생김새에서 여러 민족의 아이들이란 사실을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꼬마들은 우리에게 다가와 손을 만지고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우리가 웃으며 반응을 보이자 자기네들끼리 까르르 웃기도 했다. 몽골인에 의해 형성되기는 했지만 동·서양의 경계, 민족의 경계를 전혀 느낄 수 없는 마을이었다.
/박광희기자 khpar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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