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베르토 후지모리 페루 대통령은 왜 갑작스럽게 퇴진 결정을 내렸을까. 권력유지를 위해 헌정중단, 의회해산 등도 마다하지 않았던 그의 전력(前歷)을 감안하면 의구심은 더욱 커진다.미구엘 크루차가 전 상원의원은 “후지모리의 강력한 정권장악 능력에 비춰볼 때 설명할 수 없는 뭔가가 일어났을 것”이라며 그의 퇴임배경에 강한 의문을 표시했다.
가장 설득력있게 제시되는 것은 이번 사건의 단초를 제공한 블라디미르 몬테시노스 국가정보부(NIS) 부장을 축으로 하는 군부와 후지모리 대통령과의 권력암투에서 후지모리가 밀려났다는 분석이다.
비디오테이프 공개 이전까지 후지모리의 분신으로 여겨졌던 몬테시노스였지만, 한사람이 제거돼야 할 절박한 상황에 이르자 군부의 강력한 지지를 받고 있는 몬테시노스 대신 후지모리가 축출됐다는 게 정가의 계산이다.
지금까지 알려졌던 후지모리의 군 장악력도 몬테시노스를 매개로 한 것이었고, 따라서 후지모리의 퇴진에도 불구, 몬테시노스는 여전히 건재할 것이라는 전망이 정가에 무성하게 퍼져 있다.
군부의 이너서클을 취재해 온 칼럼니스트 미르코 라우에는 “몬테시노스에 충성하는 최고위급 군 간부들이 그를 해임하지 못하도록 후지모리에게 압력을 가했다” 며 “후지모리로서는 그를 제거할 수 없다면 자신이 물러나는 것외에 방법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 이라고 말했다.
사실 NIS 부장이라는 직함만으로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몬테시노스의 영향력이 엄청나다는 것은 정가의 상식처럼 돼 있다. 군 장성의 임면권을 좌지우지해왔고, 비밀첩보망을 가동, 정적제거를 위한 각종 정보를 독점했다. 이 때문에 일부에서는 ‘제2의 후지모리, 몬테시노스’가 아닌, ‘제2의 몬테시노스, 후지모리’라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
헨리 페아세 야당의원은 “몬테시노스는 결국 살아남을 것” 이라며 후지모리가 재선거 약속을 제대로 이행할 수 있을 지에 대해서도 의문을 표시했다.
재선거 일정을 명확히 제시하지 않은 것도 군부와의 마찰때문이라는 시각이 우세하다. 프란시스코 베르무데스 전 육군대장은 후지모리의 발표문을 “의문투성이(Big Unknown)”라고 평한 뒤 “일정 제시는 물론, 선거를 어떻게 치를 지 조차 제시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비디오 테이프가 공개된 14일과 퇴진이 발표된 16일 사이의 이틀동안 정부로부터 아무런 반응이 없었던 것은 권력암투가 그만큼 치열했다는 것을 반영한 것이란 지적이다.
전문가들은 이같은 권력쟁투 시나리오가 사실일 경우 후지모리의 재선거 발표는 민주화로 가는 여정이 아닌 또다른 군부권력의 출현과 정치혼란으로 빠져드는 악재로 작용할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황유석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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