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지나고 아침 저녁으로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서 서울 용산 한마음공원 쉼터 제2 방사장을 차지하고 있는 독수리들의 행동거지가 심상치 않아졌다. 여름내 풀어져있던 눈동자에 총기가 돌고, 거의 3㎙나 되는 거대한 날개를 활짝 편 채 횃대를 오르내리는 품이 문만 열어주면 당장에라도 불쑥 하늘 높이 날아오를 것만 같다.^공연히 어깨를 으쓱대며 어기적 어기적 헛폼을 잡는 녀석, 마치 세속을 등진 수행자처럼 자비로운 눈매를 하고 명상에 잠긴 녀석 등 저 생긴대로 노는 독수리 형제 중 내가 남다른 관심을 갖고 지켜보는 녀석은 바로 '건달' 이라는 별명이 붙은 수컷 독수리다.
^돌이켜보면 1997년 2월2일은 내게 평생 잊을 수 없는 악몽의 순간이었다. 경기 파주시 장파리 민통선지역 얼어붙은 임진강 가에서 독수리 24마리와 흰꼬리수리 5마리가 떼죽음 당한 채 발견됐기 때문이다.
^건달이는 그 엄청난 참극 속에서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졌지만 함께 구사일생을 얻었던 동료가 기력을 회복하여 등에 전파발신기를 매달고 고향 몽골로 돌아간 뒤에도 한동안 의식을 되찾지 못해 주위 사람들을 안타깝게 했다.
^그렇게 애간장을 녹이던 녀석이 올해들어 병석을 털고 일어나 몸을 추스리더니 고참 행세를 한답시고 이놈 저놈 집적거리고다녀 사육사의 눈총을 받기에 이르렀다.
^최근엔 한술 더 떠 병약한 동료를 공격하거나 방사장에 갇힌 비둘기를 잡아먹는 강력한 야성을 드러내는 바람에 '요주의' 딱지까지 붙었지만 나는 건달이를 나무라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런 그의 변화에 내심 박수를 보냈다.
^왜냐하면 미국 해양환경청 소속 인공위성 노아가 프랑스 뚜르즈관제로 송신하는 잡다한 전파속에 건달이의 친구가 보낸 신호가 포함돼있으며 삽상한 바람결에 실려오는 그 메시지엔 분명 올해 겨울 두 녀석의 '임진강 해후'가 약속돼 있다고 믿을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서북쪽 하늘을 향해 부지런히 날갯짓을 해대는 건달이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다시는 이 땅에서 97년 2월과 같은 반자연적이고 반생명적인 '환경재앙'이 재발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김성만 한국조류보호협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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