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시장이 준(準)공황 상태로 빠져들고 있다. 호재는 없고 오로지 악재만이 둘러싸고 있는 거친 시장환경 속에서 시장참여자들은 약속이나 한 듯, 투자의 판단을 ‘팔자’대세에 맡겨 놓았다.고유가와 반도체 가격폭락, 대우차 처리차질 등 ‘실물’분야에서 야기된 쇼크는 ‘금융’시장을 강타했고, 이는 다시 기업들의 자금난 가중과 투자심리 결빙 등 ‘실물’쪽으로 번져가고 있다.
이처럼 실물과 금융이 충격을 확대 재생산하는 악순환이 반복됨에 따라 자칫 경제의 시스템 자체가 붕괴할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높아지고 있다.
▦폭락, 또 폭락 18일 금융시장은 주식·원화·채권값이 날개없이 추락하는 ‘울트라 트리플 약세’을 연출했다. 현대투신 사태로 주가가 폭락했던 4월말이후 다섯달만에 재연된 ‘블랙 먼데이’였다.
50포인트가 넘는 폭락과 함께 장을 연 주식시장은 개인, 외국인, 기관 할 것 없는 ‘무차별 투매’장세를 연출했다. 반도체값 폭락은 국내증시의 18%를 좌우하는 반도체 관련 주가를 하한가까지 끌어내렸고, 대우차 불안은 금융주를 바닥으로 밀어내렸다.
한때 서킷 브레이크(일시거래중단)까지 발동됐던 주식시장은 장 후반 낙폭을 줄였지만, 추석 연휴 이후 사흘(14,15,18일)간 종합주가지수는 111포인트나 빠졌고, 코스닥도 5분의 1(20포인트)이 증발됐다.
물론 폭락이 처음은 아니다. 작년 7월 대우쇼크로 하루 70포인트, 금년 4월에도 현대문제로 90포인트나 무너진 적이 있었다. 그래도 그때는 특정기업 문제, 즉 단발성 악재로 야기된 쇼크였고 ‘주도주’는 남아 있었기 때문에 완만하나마 시장은 기력회복이 가능했다.
하지만 현 증시폭락은 나라 안팎에서 돌출하는 ‘복합적 악재의 화학반응’이 가져 온 결과다. ‘하락 주도주’만 있을 뿐 ‘상승 견인주’는 없다. 시장의 자율반등 능력을 기대할 수 없고, 때문에 ‘환금성 위기론’까지 대두되고 있는 상황이다.
외국인 투자자금이 이탈조짐을 보이고, 고유가·반도체가격 하락으로 경상수지 악화 우려감이 번지면서 환율도 10원 이상 뛰어올랐다.
환율상승은 수출 가격경쟁력에 청신호가 되지만, 그렇지 않아도 불안한 물가를 더욱 부추기는 대가를 요구하고 있다. 외환당국 관계자는 “상승이든 하락이든 환율이 단기간에 급격히 움직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며 우려감을 나타냈다.
만약 환율의 가파른 상승세가 지속된다면 ‘환(換)리스크’에 의한 신규 외국인자금의 투자억제와 유입자금의 이탈촉진을 야기시킬 수도 있다. 국고채 금리가 연 8%대, 회사채유통수익률은 연 9%대로 올라서는 등 채권값 역시 큰 폭으로 떨어졌다.
▦실물로 번지나 준공황 양상을 빚고 있는 금융불안이 지속된다면 구조조정도, 경기 연착륙도 모두 물거품이 되고 만다. 주식시장 붕괴는 기업들의 자금조달통로를 봉쇄시키고, 채권시장 위축은 4대 그룹이외의 모든 중견이하 그룹들에 엄청난 자금압박을 가져올 수 밖에 없다.
시장이 흔들리고 투자자들이 불안한 상황에서 금융·기업구조조정은 더이상 기대할 수 없다. 문자 그대로 우리경제는 환란이후 최대위기를 맞고 있는 셈이다.
이성철기자
sclee@hk.co.kr
■재경부 대책은
공황상태로 빠져들고 있는 금융시장에 대해 정부는 ‘우려감’표시와 ‘이성 회복’호소외엔 별다른 대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악재 자체가 대부분 시장외부에서 밀려온 것(고유가, 반도체 가격하락, 포드사의 대우인수포기 등)들인데다, 그렇다고 연·기금 동원이나 기관투자자 순매수원칙 강요 등 과거처럼 인위적 주가받치기 수단을 쓰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재정경제부는 18일 공모·사모형 인수합병(M&A) 전용펀드 설립을 허용하는 것을 골자로 한 적대적 M&A 활성화 방안을 내놓았지만, 어디까지나 제도개선 차원일 뿐 폭락한 주가를 당장 끌어올릴 수 있는 재료는 아니라는 것이 주변의 평가다.
진 념(陳 稔) 재경부장관은 이날 기자간담회를 갖고 현 시장상황에 대한 입장을 피력했다. 메시지의 골자는 ‘투자자들이여! 냉정함과 참을성을 가져달라”는 것. 고유가도, 대우차 처리도, 기업자금난도 모두 정부가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으니 투자자들은 흔들리지 말아달라는 것이다.
고유가에 대해 진 장관은 “배럴당 30달러대에도 대응할 수 있는 비상계획을 갖고 있는 만큼 1,2차 오일쇼크 같은 상황을 걱정할 필요는 없다”고 말했다.
대우차 문제도 “포드의 인수포기는 포드의 문제이지 대우, 나아가 한국경제 전체에 대한 투자신뢰와는 관계가 없다”며 “대우차 정상가동을 보장하며, 선(先)인수 후(後)정산 방식을 택해서라도 빨리 처리하겠다”고 밝혔다.
또 자금시장 경색과 관련, 진 장관은 “연내 만기도래할 19조원의 회사채 차환을 위해 이달말까지 10조원, 연말까지 추가로 10조원 규모의 채권펀드를 조성하겠다”면서 “펀드조성에 우체국 예금도 동원할 예정”이라고 덧붙였다.
이처럼 모든 악재에 대해 ‘대응 시나리오’를 준비하고 있는 만큼 투자자들은 부화뇌동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금융시장의 조기회복을 낙관하지 못하는 것은 정부 스스로도 마찬가지. 한 당국자는 “어설픈 대책은 오히려 정부에 대한 시장불신을 더 부추길 수도 있다”며 “솔직히 백약(百藥)이 무효인 상황”이라고 말했다.
이성철기자
sc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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