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정보부(NIS)의 야당의원 매수장면을 녹화한 58분짜리 비디오테이프가 알베르토 후지모리 페루 대통령의 10년 독재를 무너뜨렸다.후지모리 대통령은 블라디미로 몬테시노스 NIS 부장이 1만 5,000달러에 알베르토 쿠오리 당시 야당의원을 매수하는 장면이 TV를 통해 공개된 다음날인 16일 대 국민성명을 통해 “재선거 실시”와 “NIS 해체” 등을 전격 발표했다.
또 자신은 새로운 선거에 후보로 출마하지 않겠다고 밝혀 사실상 대통령직에서 물러날 것임을 분명히 했다.
비디오 공개 이전까지 노련한 정치술책으로 야당과 국제사회의 비난압력을 피해가던 후지모리의 사임발표는 소문으로만 나돌던 부정선거가 사실임을 입증함과 동시에, 권력공백에 따른 정치격변을 예고하는 ‘쿠데타적 사건’으로 해석되고 있다.
지난 5월 대선 결선투표 이후 초법적 3선 연임에 성공했던 후지모리는 이후 민주화 요구를 부분 수용함으로써 안팎에서 끊임없이 제기됐던 부정선거 망령을 어느 정도 해소한 상태였다.
철권통치와 선거부정의 전위조직으로 악명을 떨쳤던 대통령 직속의 NIS를 입법부의 감시·감독을 받는 ‘국가정보센터(NIC)’로 개편하겠다고 공표했고, 야당인사를 총리로 임명하는 등 민심타개책을 잇달아 내놓았다.
이로 인해 후지모리 퇴진과 선거 재실시를 요구하며 계속됐던 항의시위도 대통령 취임식을 고비로 소강상태를 보여왔다.
이날 대통령의 대 국민발표 직후 수도 리마에는 각종 쿠데타설이 난무했다. 쿠데타가 이미 진행중이며, 대통령은 리마 인근 한 해군기지에 억류돼 있다는 미확인 보도가 잇따랐다.
대통령 대변인실은 부인했지만, 리마 정가는 한치앞을 내다볼 수 없는 극도의 혼미속에 빠져들었다. “독재종식”을 외치며 대통령 사임을 기뻐하는 시위대가 의회 주변을 에워쌌으며, 일부 시민들은 후지모리의 즉각 퇴임을 요구했다.
남은 문제는 재선거를 언제 치를 것이며, 언제 대통령직에서 퇴임할 것인가 하는 점. 후지모리는 성명에서 “가까운 시일내”라고 언급했을 뿐 향후 정치일정에 대해서는 일절 밝히지 않았다. 야당과 국제사회에서 요구하고 있는 몬테시노스 부장의 구속여부에 대해서도 함구했다.
이같은 점을 들어 일부에서는 후지모리의 성명을 또 다른 정치기만이라고 보는 시각도 대두되고 있다.
지난 대선에서 후지모리에 맞섰던 제1야당 지도자 알레한드로 톨레도측은 선거일정이 촉박하다는 점을 들어 후지모리의 발언에 회의를 표시하면서도 현 정국과 민심으로 볼 때 재선거가 야당에 불리하지 않다고 판단하는 분위기다.
황유석기자
aquarius@hk.co.kr
■후지모리 누구인가
사실상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알베르토 후지모리(62) 페루 대통령의 향후 거취는 어떻게 될 것인가. 페루 현지에서는 후지모리가 현재 해군기지에 억류됐으며 쿠데타가 진행중이라는 소문이 파다하게 나돌고 있다.
대통령궁 대변인이 이같은 소문은 사실이 아니라고 부인했지만 총선과 대선이 다시 실시되고 새로운 정권이 들어선다면 후지모리는 독재 시절의 각종 불법행위와 부정선거 등으로 처벌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독재자라는 말을 들어온 후지모리는 일본인 이민 2세로서 대통령에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TV 토크쇼를 진행하고 대학총장을 역임한 그는 전국대학총장연합회 회장으로 뽑히면서 정계에 뛰어들었다.
1990년 ‘개혁90’이라는 연합신당을 급조, 여당 후보인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를 이기고 집권했고 1995년 유엔 사무총장 출신인 하비에르 데 케야르 후보를 물리치고 재선했다.
집권 후 과감한 개혁을 실시한 결과 7,000%에 이르던 물가상승률을 1년만에 140%로 낮추었고, 지난해에는 4%라는 놀라운 업적을 거두었다.
반면 1992년 의회를 해산하고 인권을 탄압함으로써 독재자라는 비난을 받았고 지난 4~5월 대선에서는 부정선거의 의혹까지 겹치면서 궁지에 몰리기도 했다.
집권이후 일본과 한국식 정치모델에 관심을 가졌고 박정희(朴正熙) 전 대통령 시절 경제개발에 대해 자문을 구하기까지 했다. 1938년 리마에서 태어나 리마 몰리나 대학에서 농업경제 공학을 전공했으며 미국 위스콘신대학에서 수학석사학위를 받았다.
1996년 자신의 정책을 비판해온 부인과 이혼했다.
최진환기자
cho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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